신학대전 원전과 요약본의 비교

요약본 원 전
第一問


계시된 거룩한 학문



1.

'계시 진리가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어떤 목적. 즉 신 직관(visio Dei)에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신(神) 또는 하느님(Deus)에 관한 것이 모든 이에게 즉시로, 오류없이,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시(revelatio)가 필요하다.

第一問題(全10節)


거룩한 가르침에 관하여 -그것이 어떤 性質의 것인지, 그리고 範圍에 대하여

우리의 意圖가 일정한 限界 안에서 理解되기 위해 먼저 거룩한 가르침 自體에 관해 그것이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의 範圍가 어디까지인지를 考察할 필요가 있다.

1節; 哲學的 學文分野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이 必要한가?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이 있을 必要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① 事實 集會 3,22¹에서도 “너는 명령을 받은 일에만 전념하여라. 숨겨진 일은 너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고 하는 바와 같이 사람은 理性을 넘어가는 것에 대해 試圖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理性에 從俗되는 것들은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가 充分히 傳할 수 있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問分野 外에 또 다른 가르침을 갖는다는 것은 不必要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그 밖에도 가르침은 有에
관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 理由는 어떤 것도 有와 還置(轉換)되는 眞이 아니면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는 有의 모든 部分에 대해 論하며 또한 하느님께 대해서도 論한다. 따라서 哲學者 아리스토텔레스가 ‘形而上學’ 6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哲學의 어떤 部分은 神學, 즉 神的學文이라 불린다. 따라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 또 다른 가르침이 成立되거나 있을 必要가 없었다.

㉠ 거룩한 가르침은 계시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말한다. 즉 그런 가르침은 적극적일 수도 있고 소극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가르침은 계시와 관련된 진리의 복합을 말한다. 성 토마스가 같은 개념으로 쓰는 용어들, 즉 성서 그리고 거룩한 가르침에 귀속시키는 성격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르침의 單一性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의 단일성은 종속관계를 갖는 여러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고 사도적 전승은 교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고 교회 자체의 정의는 성서와 사도적 전승의 의미와 내용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고 인간의 이성은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을 말한다. 처음의 두 원천은 다른 것들을 조건 지어 준다. 교회와 신학자의 이성은 前者들의 내용을 명백하게 하여준다. 성서와 전승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가르침을 명시할 때 여러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본래 節은 일차적으로 마디를 가리킨다. 따라서 식물계에서는 대의 마디를 가리켜 竹節이라 하고 인체에서 는 마디를 가리켜 關節이라 한다. 라틴어에서는 관절을 articulus라 하였다. 이런 마디節을 문장에 도입하여 그 구분을 章, 節로 표기해 왔다. 그러므로 라틴어의 구분인 pars는 우리말로 部를 caput은 章으로 articulus는 節로 표기하여 왔다. 그리고 章, 節의 구분은 우리 문장의 관례이다. 이희승 저 ‘국어대사전’도 문장의 구분을 章, 節로 제시한다. 이런 구분을 더 세분하여 갈 때는 條, 項 등으로 표기한다. 章, 節의 경우 節의 내용이 Q짧은 때는 項으로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성 토마스가 ‘신학대전’ 서술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성 토마스는 모든 문제의 시작에서 그 문제가 내포하는 문제들의 제목을 열거한다. 그리고 각 절은 ‘다음과 같이 (이렇게) 진행된다.’로 시작된다. 그 전개방법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이다. 즉 각 절의 제목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 인가?’, ‘… 이 아닌가?’의 의문문으로 제시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贊, 反의 토론을 거치지 않는 해결, 다시 말해 이런 토론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명백하고 결정적인 해결의 편견을 배제한다.
⒜ 그는 간략한 선행적 토론을 설정한다. 그것은 항상 ‘… 으로 생각한다.’로 제시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토마스가 주장하려는 것과 다른 난제들을 제시한다. 이런 견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항상 성 토마스의 학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 토마스는 가끔 그런 난점들을 해명하려고 한다.
⒝ 이런 논거들 다음에 토마스는 둘째 부분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러나 반론이 있다.’로 표시한다. 여기서 위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주장이 하나 혹은 여럿이 제시된다. 이런 주장은 위 논거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은 아니며 토마스로부터 항상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런 주장이 토마스 자신의 해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 그는 가끔 그런 주장을 배척한다.
⒞ 문제 해결의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토마스가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신의 해결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는(이상의 것에) 답하여 말하여야 한다.’로 시작된다. 혹은 또 이것에(이상에) 답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해결은 각 節의 主文(본문) 전체를 형성한다. 이 부분의 전개는 획일적으로 되지 않고 문제의 다양성에 따라 또는 벌써 취급한 문제들과의 관련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며 더 풍요로운 진리가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는 문제가 잘 드러나며 증명된다. 또한 이 부분에서는 때로는 역사적 탐구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벌써 제시된 원리들의 재음미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원리들이 주어지거나 결론으로서의 텍스트가 연역되기도 한다. 사실 토마스는 여기서 그가 머리말에서 약속한 명백함과 간결함과 일관성의 양상을 잘 드러내 준다. 또한 논리적 형식에 있어서도 토마스는 여기서 다양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이 부분에서 그는 스콜라 철학후기에 많은 남용을 가져왔던 삼단논법의 경화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토마스는 위에서 제기된 논거들에 해답한다. 그는 해답에서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로 시작한다. 토마스는 위의 논거들에 대해 그것들이 토마스 자신이 해당 절에서 주장하는 학설과 배치되지 않는 한 배척하지 않는다. 즉 토마스는 자기의 학설과 배치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허용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 부분에 대해서는 드물게 논란한다. 그것은 이런 반론은 일반적으로 토마스의 학설에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논거를 토마스가 항상 자기 학설로 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의 異論에 대한 해답은 그가 주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제시된 원리들을 의거한다. 그런데 이런 해답은 가끔 토마스학설을 더 명백하게 해주며 완성시킨다.

㉣ 有는 있는 것 또는 존재자로 표현된다. 문맥 여하에 따라서는 존재, 실재, 존재사물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철학적 용어로서 유와 있는 것, 존재자 등은 동의어로 쓰인다. 전통철학에서는 엄밀한 의미로 유와 존재가 사이에도 이래와 같은 이유로 구별을 짓는다. 유(ens)는 라틴어 동사 있다(esse)의 분사형이다. 이런 분사는 먼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실재하는 것, 존재자를 의미한다. ‘사랑하다’ 동사의 경우 그 분사가 ‘사랑하는’, ‘사랑하고 있는’을 표시하여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는 먼저 존재의 실천 혹은 존재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기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분사적으로 有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는 현실적으로 있는 것, 존재자에 해당된다. 또한 유는 ‘있는 주체’이거나 가능적인 것을 뜻한다. 위에서 말한 사랑의 실천의 경우, 사랑하는 현실은 그 행위의 주체를 전제한다. 이런 주체는 그 행위의 가능성이다. 이것은 사랑의 행위가 현실화되기도 하고 현실화되지 않기도 하여 주체로, 가능성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개념을 명사적 有라 한다. 이런 것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것, 본질적인 것, 즉 유 전반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로 명사적 有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 가능한 것, 혹은 純 가능적인 것, 즉 純 본질적인 것에도 유개념은 해당된다. 따라서 ens를 단적으로 존재자로 표현하는 데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물의 작용 혹은 활동성과 현실성 그리고 주체와 가능성 등에서 유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 형이상학 특히 토마스 철학은 유의 존재론적 구조인 존재와 본질 문제를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분사적 유는 존재를 의미하고 본질을 公認知 혹은 함축한다. 또 한편 명사적 유는 분사적 유보다 형이상학이 더 폭넓은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명사적 유는 현실적 유(존재)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순수 가능적 유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유 외에 가능유도 있다. 이렇게 우리 인식 작용은 유개념의 존재론적 분석에서 본질과 존재의 개념에 도달한다. 토마스는 유의 본질과 존재의 실재적 구별을 명쾌히 제시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실제적으로 구별되며 대칭되는 낱말이기 때문에 존재가 표현되는 존재가 안에 본질을 내포시켜 쓰는 것은 그리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본질을 무시하거나 전적으로 본질을 인정치 않는 경우에는 ens를 표현하는 데 있어 존재자 일변도로 쓰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쓰고 있는 四有(本有, 生有, 死有, 中有) 용어에도 유의함이 좋을 것이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는 각기 독특한 내용을 담은 철학용어들이 있듯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성 토마스에게도 그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용어 ens(有)의 개념이 부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용어의 부적합성 내지는 오류가 내용의 眞相을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킨 예를 우리는 역사의 흐름속에서 역력히 보아 온 터이다. 토마스의 유의 개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본질과 존재는 토마스 철학에서 엄밀한 의미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만 본질도 有無의 입장에서 볼 때 없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로 있는 것이니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존재자’로 표현되는 것도 가능하다.

㉤ 이런 이론은 근대 합리주의에서 재연되었다. 이런 주의사상은 신학이 인간을 그 본성상 불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신학은 무용한 학설이며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을 인간의 품위와 자율성에 해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고려할 여지가 없는 것이고 학문함에 있어 인간은 철학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철학은 최고의 지혜이며 전 우주는 철학의 판단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주장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을 볼 것이며 거룩한 가르침의 영구한 유익성을 그가 어떻게 논증하는지를 볼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티모 3,16에서는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라고 한다. 神的 靈感으로 이루어진 書冊은 人間 理性에 의해 發見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에 從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외에 神的 靈感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學文이 있는 것이 有益하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人間의 救援을 위해 人間 理性으로 探究되는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 하느님의 啓示를 따라 이뤄지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 必要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人間은 하느님으로부터 理性의 把握을 넘어가는 어떤 目的에로 秩序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사 64,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라고 한 말대로 이다. 그런데 人間은 自己의 意圖나 行爲를 目的에로 秩序지어 주어야 하므로 人間은 目的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人間의 救援을 위해 人間의 理性을 넘어서는 것들이 하느님의 啓示를 통해 人間에게 알려질 必要가 있었다.

또한 人間 理性으로 探究할 수 있는 하느님에 관한 것에 대해서도 人間은 神的 啓示를 敎育될 必要가 있었다. 그 理由는 하느님에 대해 理性으로 探究되어야 할 眞理는 적은 數의 사람들에게만 可能할 것이며 또한 오랜 時間을 거쳐 많은 誤謬가 뒤섞여 人間에게 渡來할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眞理의 認識에 하느님 안에 있는 人間 救援이 달려 있다. 따라서 人間에게 救援이 더 共通的으로 더 確實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神的인 것에 대해 神的 啓示로 가르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理性에 의해 探究되는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도 啓示로 말미암은 거룩한 가르침이 있어야 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人間의 理性 以上의 것을 人間은 理性으로 探究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信仰으로 하느님께로부터 啓示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聖書의 같은 곳에서 계속해 “눈동자가 없으면 빛을 보지 못한다. 아는 게 없으면 큰소리치지 마라.”(集會 3,25)라고 한다. 바로 이런 點에서 거룩한 가르침이 成立된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認識될 수 있는 것에 대한 觀點의 差異는
다른 여러 學文을 導入한다. 天文學者와 自然學者는 같은 結論을 論證해 낸다. 예컨대 ‘地球는 둥글다’고 한다. 그러나 天文學者는 數學的 方法, 즉 數學的 媒辭, 다시 말해 質料에서 抽象되는 媒辭로 論證한다. 그런데 自然學者는 質料에 대해 考察하는 媒辭로 論證한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가 自然的 理性의 빛으로 認識할 수 있는 觀點에서 다루는 같은 事物들을 다른 學文이 神的 啓示의 빛으로 認識하는 觀點에서 다루어도 아무런 支障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에 속하는 神學은 哲學의 한 部分의 자리를 갖는 神學과는 그 類가 다르다.



㉥ 이 반론에서 제기된 논거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나타났다. 계시에서 분출된 거룩한 교설은 그리스도교가 도래한 후 세계에서 사상과 삶을 새롭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 교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할 수 없었던 새롭고 높고 풍요로운 말과 용어들을 산출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설의 유익성은 더 논란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거룩한 교설, 신학을 대학에서 추방하려는 움직임은 아주 잘못된 인식이며 크나큼 不義인 것이다.

㉦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즉 원리의 다양성은 학문을 다양화하기에 충분하고 可知的 類의 다양성이 원리의 다양성에 수반된다.”(분석론 후서 주해 1권)

㉧ 토마스 당시에는 천문학이 수학에 속하였다.




2.

'이 계시 진리 또는 신학(theologia)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들로부터 흘러나온 이론 체계일 뿐 아니라 신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의 당당한 학문인 기하학이 그러하듯이)확실한 원리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2節;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인가?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모든 學文은 自明的 原理에서 出發한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은 自明한 것이 아닌 信仰條項에서 出發한다. ㉩ 테살 3,2²에서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니다.

② 그 밖에도 學文은 個別的인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거룩한 가르침은 예컨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行蹟 등과 이와 비슷한 것들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三位一體論’ 14券에서 “그것에 의해 아주 健全한 信仰이 생겨나고 養育되고 保護되고 全長하게 되는 그런 것만이 이 學文에 歸屬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거룩한 가르침 外에 다른 어떤 學文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다. 그런데 學文은 두 가지 種類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學文은 知性의 自然的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데 예컨대 算術學, 幾何學 등의 學文의 경우다. 그리고 어떤 學文은 더 上位의 學文의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데 예컨대 光學은 幾何學에 의해 明白하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며 音樂의 學文은 算術學에 의해 알려진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거룩한 가르침은 이런 後者의 樣態로 學文이다.
그것은 記實 거룩한 가르침이 하느님과 福된 자들에 관한 더 높은 學文의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音樂의 學文이 算術學에서 주어진 여러 原理를 믿는 것과 같이 거룩한 學文은 하느님께로부터 啓示된 여러 原理를 믿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各 學文의 여러 原理는 自明的으로 알려진 것이거나 더 上位의 學文의 知識이 還元된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의 原理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後者의 것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에 있어서 個別的인 것들이 傳해 지는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個別的인 것들이 導入되는 것은 때로는 倫理學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生活의 模範을 위한 것이고 때로는 聖書와 거룩한 가르침의 基礎인 하느님의 啓示를 우리에게 到達케 해 준 사람들의 權威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 토마스는 거룩한 가르침이 학문이라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일정한 어떤 인식이 라는 관점에서 학문일 뿐만 아니라 또 어떤 善을 향해 움직여 가는 情意的 인식이라는 관점에서도 학문이 며 그뿐 아니라 그 자체로 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학이 그것이 탐구하는 고유 영역(하느님)과 고유한 원리(신앙조항)와 고유한 빛(계시)과 고유한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학자들의 정신 안에 신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사람이 신앙으로 계시의 대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은 하느님의 지식으로부터 분여된 확실성을 갖는다. 즉 하느님의 지식에 참여하는 확실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계시로 받은 진리를 지성적으로 탐구하고 생명적인 내용을 발전시키며 사물들의 관계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신학을 절대적 진리와 교류하는 학문으로 생각한다.

㉩ 직접적으로 알려진 원리에서 출발하고 추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났고 430년에 히포에서 사망했다. 그는 히포의 주 교였다. 성 토마스는 그를 매우 존경하였으며 그의 권위를 자주 인용한다.





3.

그리고 그것은 그 다수성 속에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다. 그것은 온통 오직 계시된 것들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3節;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인가?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哲學者의 ‘分析論 後書’ 1券에 따르면 “單一한 學文이란 單一한 種類의 主題에 관한 學文이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이 다루고 있는 創造主와 被造物은 單一한 種類의 主題에 包含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이 아니다.

② 그 밖에도 거룩한 가르침에서는 天使와 物體的 被造物과 人間 倫理 등에 대해 다루어진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各岐 다른 學文에 속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聖書는 거룩한 가르침에 대하여 單一한 學文과 같이 말한다. 智慧 10,10¹에서는 “지혜는 그를 바른길로 이끌고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었으며 거룩한 것들을 알려 주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이다. 사실 能力과 能力態의 單一性은 對象에 따라 考察되어야 하며 그것은 質料的으로가 아니라 對象의 形相的 이유에 의해 考察되어야 한다. 예컨대 사람과 당나귀와 돌은 視覺의 對象인 색깔이 있는 것이란 形相的 理由에서 一致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聖書는 神的으로 啓示된 것들을 考察하기 때문에 神的으로 啓示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 學文의 對象으로서의 形相的 理由 안에 共通性을 갖는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다 같이 單一한 學文으로서의 거룩한 가르침 밑에 包含된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하느님과 被造物을 均等하게 規定하는 것이 아니고 根源的으로 하느님에 대해 다루고 被造物에 대해서는 그것이 始原이며 終極인 하느님과 關聯되는 限에서 다룬다. 그러므로 學文의 單一性이 損傷되지 않는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下位의 能力 혹은 下位의 能力 狀態가 아래와 같은 素材, 즉 上位의 能力 혹은 上位의 能力 狀態에 所屬되는 素材에 따라 多樣化되는 것을 아무도 妨害하지 않는다.

이 理由는 上位의 能力 혹은 能力 狀態는 더 普遍的인 形相的 理由(觀點)에서 對象을 考察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共通監觀의 對象은 加減的인 것인데 그것은 자기 안에 可視的인 것과 可聽的인 것을 內包한다. 따라서 共通監觀은 하나의 能力이지만 五官의 모든 對象에 미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가르침은 單一한 學文이면서 다른 여러 哲學的 學文에서 다루어지는 것들을 單一한 觀點에서 考察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마치 모든 것에 대한 單一하고 單純한 神的 知識의 壓印과 같은 것이다.



㉫ 그러므로 계시는 거룩한 가르침의 형상적 대상이다. 사실 거룩한 가르침이 관여하는 모든 진리는 계시로 말미암아 조명된다.
㉬ 공통감각은 외부 감각들의 변화를 지각하며 여러 감각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식별한다. 사실 우리는 공통감각으로 우리가 산다는 것을 지각하며 여러 감각들의 감각적인 것들을 식별한다. 예컨대 우리는 흰 것과 단것을 구별, 식별한다.




4.

신학은 인간 활동들을 성찰함으로써 신에 관한 사정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학문(scientia speculative)이다.

4節;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인가?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形而上學’ 2券에 의하면 “實踐的 學文의 目的은 行動이다.”라 하였다.
또 야고 1,22에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대로 거룩한 가르침은 行動에로 秩序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이다.

② 그 밖에도 거룩한 가르침은 옛 法과 새 法으로 區分된다. 法은 實踐的 學文인 倫理學에 속한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모든 實踐的 學文은 人間의 行動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關聯된다. 예컨대 倫理學은 人間의 行爲와, 建築學은 建築物과 關係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은 原理的으로 하느님에 관한 學文이다. 人間은 하느님의 作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이 아니고 오히려 思辨的 學文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單一한 學文이다. 그러나 거룩한 가르침은 앞에서 여러 哲學的 學文에 關係되는 것들을 形相的 理由 때문에 包含한다. 즉 그런 모든 것은 神的 빛으로 認識될 수 있는 것이라는 形相的 理由 때문이다. 따라서 哲學的 學文들에서는 어떤 것은 思辨的이고 어떤 것은 實踐的이지만 거룩한 가르침은 이와는 달리 이 두 가지를 다 같이 自體 안에 包含한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 같은 知識으로 自身을 알며 당신이 行하시는 바를 아는 것과 같다.

거룩한 가르침은 實踐的 學文이기보다는 오히려 思辨的 學文이다.
그 理由는 거룩한 學文은 人間的 行爲보다는 더 原理的으로 神的인 것에 관하여 論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人間的 行爲로 말미암아 사람이, 永遠한 幸福이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完全한 認識에로 秩序지어지는 限에 人間的 行爲에 관하여 論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異論에 대한 對答도 確實하게 된다.





5.

이처럼 그 대상이 가장 고상하기에, 따라서 '가장 고상한 학문'이다.

5節;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學문들보다 더 優位에 있는가?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學文들보다 優越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確實性이 學文의 優越成에 關係된다.㉭ 그 根本 原理들에 관해 疑心할 수 없는 다른 學文들에 있어서는 그 根本 原理들, 즉 信仰條項들이 疑心의 餘地가 있는 거룩한 가르침보다 더 確實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른 學文들은 거룩한 가르침보다 더 優越한 것으로 보인다.

② 그 밖에도 더 아래 學文은 더 위의 學文에서 그 價値를 받는다. 그것은 마치 音樂家가 數學者에 依存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은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에서 어떤 것을 받는다. 事實히에로니무스는㉠ ‘로마市의 雄辯家 마그누스에 보낸 書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 博士들은 그들의 著書들을 哲學者들의 많은 學說과 意見으로 채우고 있는데 당신은 그것들 中 어떤 것을 먼저 感歎해야 할 것인지, 즉 世俗的 知識인가 아니면 聖書들의 知識인가? 어떤 것을 먼저 感歎해야 할 지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學文들보다 더 아래의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즉 箴言 9,3은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 學文은 어떤 意味로는 思辨的 學文이고 또 어떤 意味로는 實踐的 學文이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모든 學文들, 思辨的(觀照的) 學文이건 實踐的 學文이건 간에 그것들을 넘어간다. 思辨的 學文들 中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優位에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確實性 때문이며 다른 便으로는 그 素材의 優越性 때문이다. 그런데 이 學文은 이 두 가지 面에서 다른 思辨的 學文들을 凌駕한다. 確實性에 있어서 다른 學文들은 틀릴 수 있는 人間 理性의 自然的 빛에서 確實性을 갖지만 이 學文은 속을 수 없는 神的 빛에서 確實性을 갖는다. 또 素材의 優越함에 있어서도 거룩한 가르침은 原理的으로 그 높이에 있어서 理性을 超越하는 것과 關聯하지만 다른 學文들은 理性에 從屬되는 것 만을 考察한다.


㉭ “학문은 사물의 확실한 인식이다.”(분석론 후서 주해 1권) ㉠ 347-420년경의 인물, 그는 교회의 출중한 교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성서 번역과 주해로 유명하다. 토마스는 이분의 성서 주해를 존중한다.


그리고 實踐的 學文들 사이에서는 더 窮極的인 目的에로 秩序지어진 것이 더 優位에 있다.
예컨대 政治學은 軍事學보다 優位에 있다. 그것은 軍隊의 善은 국가의 善에로 秩序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이 實踐的 學文인 限 그 目的은 永遠한 幸福이며 實踐的 學文들의 다른 모든 目的이 窮極的 目的인 이 永遠한 幸福에로 秩序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觀點에서 거룩한 가르침이 다른 學文들보다 優位에 있음이 明白하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 本性에서 더 確實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 知性의 虛弱性 때문에 덜 確實할 수 있다는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形而上學’ 2券에서도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知性은 “事物들의 가장 明白한 것에 대해서 마치 박쥐의 눈이 太陽의 빛을 對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信仰條項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갖는 疑惑은 그 自體의 不確實性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知性의 虛弱성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動物論’ 11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最高의 事物들에 對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最小의 認識은 아주 하찮은 事物들에 대해 갖는 가장 確實한 認識보다 더 바람직하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哲學的 學文들에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必然性에서 哲學的 學文들을 必要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가르침이 傳達하는 것들을 더 明白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事實 거룩한 가르침은 自己 原理들을 다른 學文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直接 하느님으로부터 啓示로 받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學文들을 自己보다 더 位의 것으로 하여 그것들에서 自己 原理들을 받는 게 아니라 다른 學文들을 더 아래 것으로 또 下女로서 使用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建築學이 그것 밑에서 從事하는 學文들 을 使用하는 것과 같고 또 政治學이 軍事學을 使用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다른 學文들을 使用하는 것도 그 自體의 缺陷과 不足性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知性의 缺陷 때문이다. 즉 우리 知性은 自然的 知性에 의해 認識되는 것들을 利用하여 理性을 넘는 것들에게로 더 쉽게 引導된다. 즉 그 다른 學文들은 自然的 理性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거룩한 가르침 안에 주어지는 理性을 넘어가는 것들에게로 더 쉽게 引導된다.





6.

아니, 그것은 단지 학문일 뿐 아니라 동시에 '지혜(sapientia)'이다.
가장 고상한 것들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6節; 거룩한 가르침은 智慧인가?

이 가르침은 智慧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自己 가르침의 原理를 다른 데서 받는 가르침은 그 어떤 것도 智慧의 이름을 갖기에 合當치 않다. 그것은 “智慧로운 者의 일은 秩序를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形而上學 1券)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이미 明白히 말한 바와 같이 그 原理들을 다른 데서 받는 것을 前提한 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智慧가 아니다.

② 그 밖에도 다른 學文들의 原理들을 證明하는 것은 智慧에 속한다. 그러므로 또한 智慧는 ‘倫理學’ 6券에서 分明히 한 것처럼 ‘學文들의 머리’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다른 學文들의 原理들을 證明하지 않는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智慧가 아니다.

③ 그 밖에도 거룩한 가르침은 硏學으로써 얻어진다. 그런데 智慧는 注入에 의해 갖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이사 11,2에서 明白히 보는 바와 같이 聖靈의 일곱 恩賜에 든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智慧가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神命 4,6에서는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 가르침은 모든 人間的 學文 중에서 最高의 智慧이다. 그런데 이렇게 智慧라고 하는 것은 어떤 類(分野)에 있어서가 아니라 無條件的으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智慧로운 者의 일이 秩序를 주는 것이며 判斷하는 것이고 判斷을 더 높은 原因을 통해 더 낮은 것들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 에 該當 分野의 最高 原因을 考察하는 사람이 그 分野의 智慧로운 사람이라고 불린다. 예컨대 建築分野에서는 집의 形相을 構想하는 사람이 智慧로운 사람이라 불린다. 이런 사람들은 돌을 다듬거나 石灰를 준비하는 下級 勞動者와 區別하여 建築家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1코린 3,10¹에서는 “나는 하 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따라서 箴言 10,23²은 “슬기로운 이는 지혜를 즐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全 宇宙의 無條件的 最高原因, 즉 하느님을 考察하는 사람은 最高로 智慧로운 사람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 스가 ‘三位一體論’ 12券에서 明白히 한 바와 같이 智慧는 神的인 것들에 대한 認識이다.

거룩한 가르침은 하느님을 最高 原因인 限, 가장 固有하게 規定한다. 그것은 그것이 規定하는 바가 다만 被造物들로 말미암아 認識될 수 있는 것에 局限되는 것이 아니라(이런 것은 哲學者들도 알았으며 로마 1,19에서도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 문이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라고 한 바와 같다.) 오히려 거룩한 하느님 自身에 대하여 人間들에게만 알려지고 다른 것들에게는 啓示를 통하여 傳達된 것에 관하여 規定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最高의 智慧이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自己 原理들을 다른 人間的인 學文에서가 아닌 神的 知識에서 받는다. 즉 우리의 모든 認識이 그것에로 秩序지어지는 最高의 智慧로부터 받는 것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다른 學文들의 原理들은 自明하여서 證明할 수 없는 것이거나 어떤 다른 學文에서 自然理性으로 말미암아 證明된다.
그런데 이 學文의 固有한 認識은 啓示로 말미암은 것이고 自然理性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學文에 속하는 것은 다른 學文들의 原理들을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런 것들에 대해 判斷하는 것이다. 즉 다른 學文들에 있어서 그 眞理에 排置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虛位로 排斥된다.
그러므로 2코린10,4²-5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모든 오만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포로로 잡아 그리스도께 순종시킵니다.”라고 한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判斷은 智慧로운 사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判斷함의 두 가지 樣態에 따라 智慧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傾向의 樣態로 判斷하는 것이다. 예컨대 德의 習性을 가진 사람은 德性 있게 行해야 할 것에 대해 올바르게 判斷한다. 그것은 이런 사 람이 그런 것에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倫理學’ 10券에서도 德이 있는 사람은 德行은 없을지라도 德行에 대해 判斷할 수 있다. 그러므로 神的인 것들에 대해 判斷하는 첫째 樣態는 聖靈의 恩賜로 주어지는 智慧에 속한다. 그러므로 1코린 2,15에서도 “靈的인 사람은 모든 것을 判斷할 수 있지만 그 自身은 아무에게도 判斷 받지 않습니다.”라고 하였고 디오니시우스도 ‘神名論’ 2章에서 “히에로테우스는 다만 神的인 것들만 배움으로써만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몸에 지님으로써 學者가 되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判斷함의 둘째 樣態는 硏學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서 이 가르침에 속한 다. 그러나 이때도 물론 그 原理들은 啓示에 根據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틀릴 수 있는 고유한 이성으로 알아들은 것에 대해서보다는 틀릴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들은 것에 대해 더 큰 확실성에 이르게 된다.”(2부의 2 4문제 8절)

㉢ 믿는 자가 아주 강력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에 반대되는 움직임이 어떤 믿는 자 안에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리론’ 14문제 1절 主文 참조.

㉣ 거룩한 가르침은 형이상학을, 그 가르침이 다루는 것들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7.

출발점이자 규범인 신(神)은 신학의 '주제(subjectum)'이다.

7節; 하느님이 이 學文의 主題인가?

하느님이 이 學文의 主題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어떠한 學文에 있어서도 ‘무엇인가’라는 主題를 前提해야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分析論 後序’ 1券에서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學文은 하느님에 대해 그가 ‘무엇인가’의 認識을 前提하지 않는다. 事實 다마스케누스도㉥ “하느님에 있어서는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不可 能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이 學文의 主題가 아니다.

②그 밖에도 어떤 學文 안에 規定되는 모든 것은 그 學文의 主題 下에 包含된다. 그런데 聖書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것 外에 다른 많은 것들에 對해 예컨대 被造物이라든가 人間의 道德 등에 대해 規定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이 學文의 主題가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學文의 主題는 學文에 있어서 그것에 對해 論議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學文에 있어서는 하느님에 對해 論議된다. 事實 이 學文은 하느님에 대해 論議한다는 意味로 神學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 學文의 主題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이 學文의 主題다. 事實 主題는 學文에 對하여 마치 對象이 能力이나 習性에 대한 것과 같은 關係에 있다. 그런데 固有한 意味로 어떤 能力이나 習性의 對象으로 指稱되는 것은 그것의 理由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能力과 習性에 關聯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과 돌이 視覺에 關聯되는 것 은 그것들이 색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깔이 있는 것은 視覺의 固有한 對象이다. 거룩한 가르침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觀點에서 다루어진다. 다루어지는 것들이 하느님 自身이거나 혹은 그 始原과 窮極으로서의 하느님께로 秩序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참으로 이 學 文의 主題이다. 이것은 또한 이 學文의 原理(出發點)들에서도 明白하다. 이런 原理들은 信仰條項이며 信仰은 하느님께 對한 것이다. 그런데 原理들(基本命題들)의 主題와 모든 學文의 主題는 같다. 모든 學文은 含蓄的으로 原理들 안에 包含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學文에서 考察되는 理由를 따라서가 아니라 이 學文에서 다루어지는 것들에만 留意하여 이 學文의 素材를 다른 模樣으로, 즉 事物과 象徵, 혹은 復舊(救援)의 業, 혹은 全 그리스도 즉 머리와 肢體 등으로 考察하였다. 사실 이 學文에서 이런 모든 것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것 은 하느님께 對한 秩序에 따라 이루어진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르침에 있어서 正義 자리에 하느님의 結果(그것이 自然의 結果이건 恩寵의 結果이건 간에)를 사용하여 하느님에 대해 考察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마치 어떤 哲學的 學文들에 있어서 原因의 正義대신 結果를 받아들여 原因에 대해 어떤 것을 結果로 말미암아 論證하는 것과 같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에서 規定되는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內包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部分으로서가(혹은 種으로서, 혹은 偶有로서) 아니라 어떤 模樣으로 하느님께로 秩序지어진 것으로 內包된다.



㉤ 학문적으로 주제, 즉 주어란 그것에 대해 결론에 있어 설명어(술어)가 서술, 논증되는 그런 것이다.
㉥ 다마스케누스(675-749년경)는 고대 그리스도교회의 최후의 위대한 신학자이다. 그의 유명한 저서는 ‘전통신앙론’이다.




8.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성(ratio)의 논술 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들을 해결한다.

8節; 거룩한 가르침은 論證될 수 있는 것인가?

이 가르침은 論證될 性質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암브로시우스는㉦ ‘가톨릭 信仰論’에서 “信仰을 묻는 데서는 論證을 除去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가르침에서는 특히 信仰이 問題된다. 따라서 요한 20,31은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論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② 그 밖에도 이 가르침이 論證될 수 있는 것이라면 權威나 理性에서 論證될 것이다. 만일 權威에서 論證된다면 이 가르침의 品位에 適合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에티우스에㉧ 의하면 權威에서의 論證은 가장 虛弱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理性에서 論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 가르침의 目的에 適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는㉨ ‘講話’에서 “人間 理性이 經驗的 論證을 주는 것이라면 信仰은 價値를 갖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論證될 수 있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티토 1,9에서 監督者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다른 學文들은 自己 基本 原理들에 대해 論證하지 않고 그런 學文들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明白히 하기 위해 그런 基本 原理들에서 論證하는 것과 같이 이 가르침도 自己의 原理들, 즉 信仰條項들을 證明하기 위해 論證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原理들에서 다른 것을 明白히 하기 위해 前進한 다. 그것은 使徒가 1코린 15,12 以下에서 그리스도의 復活에서 復活 一般을 證明하기 위해 論證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哲學的 學文들에 있어서 有意해야 할 點이 있다. 그것은 더 아래 學文들은 自己의 原理들을 證明하지도 않고 反對者들에 대해 論難하지도 않는다는 事實이다. 더 아래 學文은 이런 것을 더 位의 學文에 남겨놓는다. 그런데 이런 哲學的 學文들 中 最上位의 學文, 즉 形而上學은 反對者가 어 떤 基本 原理를 認定한다면 討論을 벌인다. 만일 反對者가 아무것도 認定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과 더불어 討論할 수 없다. 이때는 다만 그 異論에 대해 解答해 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도 더 位의 學文을 갖는 것이 아니므로 自己의 原理를 否定하는 사람들과 論難한다. 이때 反 對者가 神的 啓示로 말미암아 갖게 된 原理들 中 어떤 것을 認定한다면 論證함으로써 그와 討論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때 거룩한 가르침들의 權威를 통해 異端者에 反對하여 論難하게 되고 한(一) 信仰 條項을 拒否하는 사람들에 對抗해서는 다른 信仰 條項을 통해 討論하게 된다. 그런데 反對者가 하느님으로부터 啓示된 原理들 中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理性을 통해 信仰 條項을 證明할 길 은 없는 것이며 反對者가 信仰에 反對되는 어떤 異論들을 이끌어 들인다면 그것에 解答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事實 信仰은 틀릴 수 없는 眞理에 根據하고 있는 까닭에, 또 참된 것에 矛盾되는 것이 論證될 수 없는 까닭에 信仰에 反對하여 提示되는 證明들은 明白히 論證이 아니며 解答되어야 할 論難인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人間 理性의 論證은 信仰에 속하는 것들을 證明할 位置에 있지 않으며 다만 이 가르침만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信仰條項들에서 다른 것들을 論證해 가는 것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權威에서 論證하는 것은 이 가르침의 가장 固有한 것이다. 그것은 이 가르침의 原理들을 啓示로 말미암아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 우리는 이렇게 啓示가 주어진 사람들의 權威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것이 이 가르침의 品位를 損傷시키는 것이 아니다. 人間 理性에 根據를 갖는 權威에서의 論證은 매우 虛弱한 것이지만 神的 啓示에 根據한 論證은 매우 有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룩한 가르침은 人間 理性을 使用한다. 그것은 信仰을 證明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信仰의 功勞가 喪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 안에 傳해지고 있는 것들을 明白히 하기 위해 理性이 使用되는 것이다. 恩寵은 自然을 破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完成하기 때문에 自然 理性은 信仰에 助力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意志의 自然的 傾向이 사랑에 順從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使徒는 2코린 10,5에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모든 오만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포로로 잡아 그리스도께 순종시킵니다.”라고 한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은 哲學者들이 眞理를 自然理性으로 認識할 수 있을 때 그들의 權威를 使用한다. 그것은 바오로 使徒는 17,28에서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라고 하면서 아라투스의 말을 引用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거룩한 가르침이 이와 같은 權威를 使用하는 것은 말하자면 外的 權威와 蓋然的인 論據를 使用하는 것이다. 聖書의 政經의 權威는 必然性에서 論證하므로 固有한 意味로 使用된다. 그런데 다른 敎會의 博士들의 權威는 固有한 것으로부터 論證하기는 하지만 蓋然的으로 論證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 信仰은 政經들의 著者인 使徒들과 預言者들에게 이루어진 啓示에 根據한다. 그러나 敎會의 博士들에게 어떤 啓示가 있다 할지라도 그런 啓示에 根據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히에로니무스에게 보낸 片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어떤 著述이 쓰일 때 그 著 者가 아무런 誤謬도 犯하지 않았음을 내가 굳게 믿고 그러한 尊敬을 드리는 것을 배운 것은, 聖書들 中에서 政經이라 불리는 書冊들에 대해서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著者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聖德과 知識이 있어서 아무리 出衆하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참되다 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 암브로시우스(339-397)는 밀라노의 유명한 주교였으며 교회의 가장 위대한 목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여기에 소개되는 ‘가톨릭 신앙론’ 외에도 많은 신학적 저서를 남겼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었다.

㉧ 보에티우스(480년경 출생)는 정치가이며 철학자이고 로마의 집정관과 원로원 일원이었다. 그는 정치에 철학적 정의를 실현하려다 많은 무고로 사형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522년 처형되었다. 그의 철학적 저서인 ‘철학의 위안’은 자못 유명하다. 그는 많은 철학적 역서와 저서, 신학적 저서를 남겼다. ‘데 헵도마디부스’와 ‘삼위일체론’ 등은 중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는 가끔 부에티우스의 저서를 인용한다.

㉨ 그레고리우스는 500년에 교황에 선출되었으며 지혜와 애덕으로 교회와 국가의 어려운 때에 큰일을 한 위대한 교황이었다. 그는 교회의 박사이며 성인이다.





9.

인간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지성적 인식을 얻어 내기 때문에, 계시를 담고 있는 성서도 '은유'들을 사용한다.

9節; 聖書가 隱喩的, 象徵的 話法을 써야 할 것인가?

聖書는 隱喩를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最下位 가르침의 固有한 것은 모든 學文 中에 最上位를 차지하는 이 學文에는 適合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의 類似나 表象(表現)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가르침 中에 最下위에 있는 詩歌 固有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類 似를 使用하는 것은 이 學文에는 適合하지 않다.

② 그 밖에도 이 가르침의 任務는 眞理를 明白하게 드러내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眞理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褒賞도 約束되어 있다. 集會 24,31에서는 “나는 ‘내 동산에 물을 대고 꽃밭에 물을 주리라.’ 하였다. 보라, 내 운하가 강이 되고 내 강이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와 같은 類似를 통해 眞理가 隱閉된다. 物體的 事物들의 類似 밑에 神的인 것들을 傳達하려는 것은 이 가르침에 適合하지 않다.

③ 그 밖에도 어떤 被造物들은 卓越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神的인 類似에 接近한다. 따라서 만일 被造物들에서 어떤 것이 하느님한테로(하느님과 비슷한 것으로) 取해진다면 이런 採擇은 할 수 있는 한 卓越한 被造物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最下位의 被造物들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 러나 聖書에서는 흔히 이런 事例가 發見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호세 12,11²에서는 “바로 내가 환시를 많이 보여 주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비유로 말하리라.”라고 한다. 어떤 것을 類似에 의해 傳하는 것은 隱喩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隱喩를 쓰는 것은 거룩한 가르침에 속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神的인 것과 靈的인 것을 物體的 類似 밑에 傳하는 것은 聖書에 適合하다. 事實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그 本性에 따라 配慮한다. 그런데 人間에게는 感覺的인 것을 통해 超感覺的인 것, 可知的인 것에 이르는 것이 本性的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認識이 感覺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聖書 에서 靈的인 것이 物體的 事物들의 隱喩 밑에 우리에게 傳達되게 되는 것은 適切한 것이다. 또 디오니시우스가 ‘天上位階論’ 1章에서 “神的인 光明은 여러 거룩한 베일로 감싸이지 않고서는 달리 우리에게 비쳐질 수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點을 말한 것이다. 靈的인 것들이 物體的 事物들의 隱 喩 밑에 提示되는 것은 로마 1,14에서도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 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共通적인 것으로 주어진 聖書에 合當한 것이다. 그것은 超感覺的인 것을 그 自體로서는 理解하기에 適合 하지 못할 만큼 無識한 사람들도 어떻든 聖書를 理解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詩歌는 그 表現을 위해 隱喩를 使用한다. 그것은 表現이 人間에게 本性的으로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聖書가 隱喩를 使用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必要하고 有益하기 때문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神的 啓示의 빛은 디오니시우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感覺的 形相 때문에 消滅되는 것이 아니고 自己 眞理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은 啓示로 받은 精神들로 하여금 類似性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이다. 또한 啓示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이런 世界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다. 따라서 聖書의 한 곳에서 隱喩로 傳해지는 것이 다른 데서는 明白히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形相的 숨김 自體는 探究者들의 訓練을 위해서도, 不信者들의 嘲笑에 對備하기 위해서도 有用하다. 여기에 대해 마태 7,6¹에서는 “거 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고 한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디오니시우스가 ‘天上位階論’ 2章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聖書에서 神的인 것들을 高貴한 物體의 形相들로 보다는 천한 物體의 形相들로 傳하는 것은 더 適切한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理由 때문이다. 첫째로는 이렇게 함으로써 人間 精神이 더 쉽게 誤謬에서 解放되기 때문이다. 事實 이때 神的인 것들에 대해 말해지는 것은 固有한 意味로 말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 明白하다. 만일 高貴한 物體의 形相들로 神的인 것들이 表現된다면 이런 것일까 하는 疑心이 있을 수 있으며 특히 物體보다 高貴한 어떤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주 疑心스러울 것이다. 둘째로는 이 方法이 이 世上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갖는 認識에 더 適合하기 때문이다. 事實 하느님에 對해서는 무엇인가보다는 무엇이 아닌가가 우리에게 더 明白하다. 따라서 그 類似가 하느님에게서 멀면 멀수록 더욱 더 그런 類似는 하느님에 대해 우 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에 대한 더 참된 平價를 하게 한다. 이와 같은 方法으로써 神的인 것이 不當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감추어지는 것이다.



㉩ 이것은 화법 즉 언어의 문제이다. 사실 언어는 고유하게 의미된 것을 어떤 유사성을 통해 전달한다.




10.

'성서'의 저자는 무한한 지능을 갖추고 있는 신이다. 신의 지능은 무한하다.
따라서 성서의 구절들을 여러 의미를 갖는다.
'축자적 의미'외에도 신앙을 위한 '우의적(allegorica)'해석, 행위를 위한 '도덕적'해석.미래 삶을 위한 '초자연적 상징적(anagogica)해석이 있다.

10節; 聖書는 한 字句 안에 여러 意味를 갖는가?

聖書는 한 字句 안에 여러 意味, 다시 말해 歷史的, 혹은 字義的 意味, 愚意的 意味, 轉義的 내지는 道德的, 神秘的(天上的) 意味 등 여러 意味를 內包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聖書 안에서의 여러 意味는 混亂과 欺滿을 造成하며 論證의 堅固性도 없게 된다. 따라서 意味가 多樣한 命題들에서는 論證이 進行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論證에 따른 어떤 誤謬들이 指摘된다. 그런데 聖書는 어떠한 誤謬도 없이 眞理를 드러내는 데 있어 效果的이어야 한 다. 따라서 聖書에서는 한 字句 안에 여러 意味가 傳해지면 안 된다.

② 그 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信仰의 有益論’에서 “舊約이라고 불리는 冊은 네 가지로 傳達된다. 즉 歷史的으로, 原因論的으로 遡及하여, 類比的으로, 寓意的으로 傳達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넷은 앞서 말한 넷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聖書의 같은 字句가 앞서 말한 네 가지 意味로 解說되는 것은 適合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③ 그 밖에도 앞서 말한 意味 외에도 그것들에 內包되지 않는 比喩的 意味가 發見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道德論’ 20券에서 “聖書는 그 話法 自體로 모든 學文을 超越한다. 그것은 같은 言辭를 통해 行蹟을 말함과 同時에 秘義를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聖書의 作家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意味를 表現하기 위해 말만을 提供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事物 自體도 提供하는 能力을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學文에 있어서 말은 意味를 表現하는데 이 學文은 말로 表現된 事物들이 또한 다른 어떤 것을 意味케 하는 固有性을 지닌다. 그러므로 말이 事 物을 表現한다는 첫째 表現이 첫째 意味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첫째 意味는 歷史的 내지는 字義的 意味다. 그런데 말을 통해 表現된 事物들이 다시 다른 事物들을 表現하는 意味 表現은 靈的 意味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런 靈的 意味는 字義的 意味에 基礎를 갖고 있으며 또 그것을 前提로 한다.

靈的 意味는 세 가지 模樣으로 區分된다. 事實 使徒도 히브 7,19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실 율법은 아무것도 完全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희망이 주어져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가 ‘敎會位階論’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새 法 自體는 ‘未 來 榮光의 象徵’이다. 또한 새 法에 있어서는 머리(그리스도)에서 行해진 것은 우리가 行하야 할 것들의 徵表다. 그러므로 옛 法의 것들이 새 法의 것들을 意味한다는 데는 遇義的 意味가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를 意味하는 것들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 우리가 行해야 할 것들의 象 徵이라는 데는 道德的 意味가 있다. 그리고 永遠한 榮光 안에 있는 것들을 意味할 때는 天上的 意味가 있다.

그런데 作家가 意圖하는 바는 字義的 意味이며 또한 聖書의 作家는 모든 것을 同時에 그 知性으로 把握하기 때문에 字義的 意味를 따라 聖書의 한 字句 안에 여러 意味를 發見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告白錄’ 12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不適한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은 意味의 多數性은 多義性 혹은 이와 비슷한 다른 種類의 多數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말이 많은 것을 意味하기 때문에 그 意味들이 多數化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을 통해 意味가 表現된 事物 自體들이 다른 事物들의 徵表일 수 있으므로 多數化 되는 것이다. 이렇게 聖書 안에서는 어떠한 混亂도 惹起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意味는 하나의 意味, 즉 字意的 意味에 基礎를 갖기 때문이다. 다만 이 點에서만 論證이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 나투스파인 빈센티우스를 反駁하는 書簡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字意的 意味로 말해지는 바에서 論證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聖書에서 어떤 것이 잃어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靈的인 意味 안에 內包된 信仰에 必要한 것으로서 聖書의 다른 것에서 字意的 意味로 明白하게 傳 해지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미 말한 셋, 즉 歷史, 遡及的 原因, 類比 등은 字意的 意味라는 하나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 自身도 설명하는 바와 같이 歷史는 어떤 것이 端的으로 敍述될 때이고 遡及的 原因이란 말해지는 것의 原因이 指摘되는 境遇인데 예컨대 마태 19,8에 서 모세가 왜 아내를 버릴 許諾을 주었는지의 原因을 주께서 直接 指摘하시는 境遇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完固함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類比는 聖書의 한 곳의 眞理가 다른 곳의 眞理에 排置되지 않는 境遇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네 意味 中 字義的인 것만이 세 靈的 意味를 위해 提 示된다. 예컨대 성 빅토르의 위고는 字義的 意味 안에 神秘的 意味도 包含시킨다. 그는 그의 ‘命題論集’ 3券에서 세 가지 意味, 즉 歷史的, 字義的, 轉義的(比喩的) 意味만을 提示한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比喩的 意味는 字義的 意味에 內包된다. 그것은 어떤 것은 말을 통해 固有하게 表現되고 또 어떤 것은 形相的으로 表現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字義的 意味는 形相 自體가 아니고 形相化된 것이다. 예컨대 聖書에서 하느님의 팔이라고 할 때 字 義的 意味는 하느님이 이런 肢體를 지녔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肢體를 통해 表現되는 것, 즉 作用의 能力을 意味하는 것이다. 여기서 確實한 것은 聖書의 字義的 意味에는 결코 거짓이 內包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의 주요 의도가 신을 그 자체로 알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물들 특히 이성적 피조물의 원리이자 목적인 한에 있어서 알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거룩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다루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신에 대해서(Ⅰ부),
그 다음 이성적 피조물의 신을 향한 여정(旅程)에 대해서 (Ⅱ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인 한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 준 그리스도에 대해서 (Ⅲ부),
신에 관한 고찰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먼저 신의 본성(natura divina)에 관해서(2-26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으로부터 발원되는 피조물들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44-119문)고찰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제1문(록키게시판 1줄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원전을 요약한 신부님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을겁니다.
한 페이지 이상의 원전을 한 줄로 요약하려면 수십번 수백번 읽고 수천번 고쳐써야 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하여도 2000여 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편찬한 이의 서문>에서 뼈다귀만 추린 물고기에 비유하셨듯이 기본 골격만이라도 한 눈에 볼
수 있어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록키(안토니오)

그럼 제2문과 제3문에 대해서도 살펴보시죠....

第二問


: 神의 實存



1.

'신이 실존한다(Deus existit)'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evidens)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컨대 '전체는 그 한 부분보다 크다'는 진술은 참되고 명증적이다.
이 나중 진술에 대해서는 실상 우리는 두 용어 '전체'와 '부분'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神)에 대해서는 '실존한다(existere)'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신'이 무엇인지 [신의 본질]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있다.

第二問題 (全3節)


神論 -하느님이 存在하는가?

앞에서 明白히 말한 바와 같이 이 거룩한 가르침의 主되는 意圖는 하느님에 대한 認識을 傳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다만 하느님이 그 自體로 存在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事物들의 특히 理性的 被造物의 根源이며 終極인 것으로서의 認識을 傳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解說이 意圖하는 바도 다음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하느님에 대해 論하고 둘째로는 理性的 被造物 의 하느님께로의 運動에 對해서 그리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인 그리스도(그가 사람인 한)에 對하여 論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考察은 세 部分으로 이루어지겠다.
즉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本質에 속하는 것 들을 考察할 것이고
둘째로 페르소나의 區別에 속하는 것들
셋째로는 被造物들의 하느님에게서의 發出에 속하는 것들을 考察할 것이다.

하느님의 本質에 對해서는 첫째로 하느님이 存在하는지를 考察할 것이고
둘째로는 하느님이 어떻 게 存在하는지, 오히려 하느님은 어떻게 存在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셋째로는 하느님의 作用에 對하 여 즉 하느님의 知識과 意志와 能力에 對하여 論할 것이다.

1節;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인가?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그 認識이 우리에게 本性的으로 內在해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自明한 것이다.

이것은 마 치 第一原理들에 對해 말할 때 明白한 것과 같다. 그런데 다마스케누스는 그의 著書의 시작에서㉫ “하느님이 實在한다는 認識은 모든 사람들에게 本性的으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 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다.

② 그 밖에도 構成名詞들이 認識될 때 즉시 認識되는 것들은 自明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리 스토텔레스도 ‘分析論 後序’ 1券에서 論證의 第一原理(命題)들에게 歸屬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全體 가 무엇인지, 部分이 무엇인지를 알면 즉시 모든 全體는 그 部分보다 크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과 같은 境遇다.
그리고 하느님의 名稱이 무엇을 意味하는 지를 理解하면 즉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名稱으로 意味되는 것은 바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實存的으로 있으며 知性에도 있는 것은 知性에만 있는 것 以上의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그 名稱이 理解될 때 知性 안에 있는 것이며 同時에 實際로 存在한다고 歸結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다.㉬

③ 그 밖에도 眞理가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다.
그것은 眞理를 拒否하는 사람도 眞理가 있 다는 것을 認定하기 때문이다. 만일 眞理가 存在하지 않는다면 眞理가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이 眞 이며 또 어떤 것이 참된 것이라면 眞理가 存在한다는 것은 當然하다.
그런데 요한 14,6²에서도 “나 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眞理 自體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아무도 自明한 것의 反對를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形而上學’ 4券과 ‘分析論 後序’ 1券에서 論證하는 第一原理들에 관하여 明白히 한다. 그런데 詩篇 53,1¹에서 “어리석은 자 마 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라고 한 바와 같이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自明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內包한다.
그 하나는 自體로서는 自明하나 우리에게는 自明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自體로서도 또 우리에게도 自明한 것이다. 事實 어떤 命題가 自明하다는 것은 述語가 主語의 槪念에 內包되는 데 起因한다.
그것은 예컨대 “사람은 動物이다.”와 같은 境遇다. 이때 動物은 사람의 槪念에 속한다. 그러므로 述語에 대해서도 主語에 대해서도 그것 이 무엇인지가 모든 사람에게 分明히 밝혀지면 이런 命題는 모든 사람에게 自明하다.
이런 것은 論 證의 第1原理에서 明白한 바와 같다. 즉 이런 第一原理(命題)의 名辭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共通된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喩와 比喩, 全體와 部分,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述語와 主語가 그것이 무엇인지 明白하지 않다면 이때 命題는 그 自體 에 있어서는 自明하다 할지라도 命題의 主語와 述語에 대해 無知한 사람들에게는 自明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에티우스도 ‘데 렙도마니부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떤 槪念들은 精神의 共通된 槪念이며 ‘非物體的인 것이 場所에 存在하지 않는다.’와 같이 智者들에게만 自明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이 命題는 그 自體에 寬限한 自明한 命題 다. 왜냐하면 이때 述語는 主語와 같기 때문이다. 後에 明白히 하겠지만 事實 하느님은 自己 存在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對해 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命題는 우리에게 自明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命題는 우리에게 더 明白하게 알려지고 그 本性을 따라서는 덜 明白하게 알려진 것을 通해 論證될 必要가 있다.
즉 結果를 通해 論證될 必要가 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認識하는 것은 어떤 一般的인 形態로 漠然하게 우리에게 本性的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이 人間의 幸 福(至福)인 限에 그렇다. 事實 人間은 本性的으로 至福을 欲求하며 또 人間에 있어서 本性的으로 欲 求되는 것은 人間에게 本性的으로 認識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端的 으로 認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는 사람을 認識하는 것이 實際로 페트루스가 오고 있다 할지라도 페트루스를 認識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人間의 完全한 善, 즉 幸福(至 福)을 富로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快樂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라는 名稱을 듣는 사람은 그보다 더 큰 것 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意味되는 것으로 理解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하 느님이 物體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하느님이란 名稱으로 여기서 말하는 것, 즉 그 名 稱으로 그보다 더 큰 것이 認識될 수 없는 것이 意味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名稱으로 意味되는 것이 實際로 存在하는 것으로 理解되는 歸結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知性의 把握에 不過하다.
하느님이 實際로 存在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認識될 수 없는 어떤 것이 實際로 存在 하지 않는 限 論證될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이 存在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認定하지 않는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一般的으로 眞理가 存在한다는 것은 自明한 것이지 만 그렇다고 第一眞理가 存在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自明한 것은 아니다.



㉪ 도나투스파는 이단자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창궐하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이단파와 많 은 논쟁을 벌였다

㉫ 다마스케누스는 749년에 사망했다. 그는 그리스 최후의 교부이며 신학의 첫 ‘백과사전’ 편집인이다.

㉬ 성 토마스는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결과를 매개로 하여 알게 된다.

㉭ 하느님은 인간 정신이 인식하는 제일 먼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형성하는 하느님의 본질의 개념은 사물들의 본성상 하느님의 존재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식 밖에 그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지를 논증 없이는 알 수 못한다.

㉠ 하느님께 대한 자연적 사랑은 하느님의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인식을 전제로 한다.




2.

그리고 증명은 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즉 (원인을 알려 주는) '결과들로부터'출발함으로써 전개된다.

2節;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論證될 수 있는가?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論證이 可能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信仰條項이다. 그런데 信仰에 관한 것은 論證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오로 使徒가 히브 11,1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論證은 知識으로 알게 하는 것인 데 反 해, 信仰은 나타나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論證될 수 없는 것이다.

② 그 밖의 論證의 媒辭는 그것이 무엇인가이다. 그런데 하느님에 對해서는 다마스케누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무엇인가는 알 수 없고 다만 무엇이 아닌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論證할 수 없다.

③ 그 밖에도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이 論證된다고 假定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結果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結果는 하느님에게 比例되지 않는다.
그 理由는 하느님 自身은 無限하고 結果는 有限한 것이니 有限은 無限에 比例하지 않기 때문이다. 原因은 그것에 比 例되지 않는 結果를 通해 論證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論證될 수 없는 것으 로 생각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使徒는 로마 1,20에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創造된 것을 通해서가 아니면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이 論證될 수 없다는 것이다. 事實 어떤 것에 對해 理解해야 하는 첫째 것은 그런 것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論證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原因을 通하여 하는 論證으로 ‘무엇 때문에’라고 일컬어진 다. 또 이런 論證은 端的으로 먼저 있는 것을 通하여 이루어지는 論證이다.
다른 하나는 結果를 通 하여 이루어지는 論證인데 그것은 ‘… 이니까’의 論證이라 불린다. 이 論證은 우리에게 있어서 먼저 있는 것을 通한 論證이다.
事實 어떤 結果는 그 原因보다는 우리에게 더 明白하기 때문에 우리는 結果를 通해 原因의 認識에로 前進한다. 그 結果가 우리에게 더 明白하게 알려진 것이라면 어떠한 結果에서든 그 結果의 固有한 原因이 存在한다는 것을 우리는 論證할 수 있다.
그것은 結果는 原因 에 속하는 것이니 結果가 주어지는 限 原因이 先在해야 하는 것은 必然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 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自明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結果를 통해 論證 될 수 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과 다른 이런 것들, 즉 로마 1,19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에 對해 自然理性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은 信 仰條項이 아니고 信仰條項들에 대한 先行事이다.
事實 이렇게 信仰은 自然認識을 前提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恩寵이 自然을 前提하며 完成은 完成될 수 있는 것을 前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自體로서 論證 可能한 것과 알려질 수 있는 것이 論證을 理解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 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不可한 것이 아니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結果를 통해 原因이 論證될 때 原因이 存在한다는 것을 證明하기 위해 原因의 正義 대신 結果를 使用하는 것이 必要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하 느님에 대해 그렇다.
즉 어떤 것이 存在한다는 것을 證明하기 위해서는 媒辭로서 그 名詞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取하는 것이 必要하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問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인가의 물 음은 있는가의 물음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後에 提示될 것이지만 하느님의 名稱들은 結果들 에서 附過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結果에서 證明할 때 우리는 媒辭로서 하느님이라 는 이 名稱이 무엇을 意味하는 지를 把握할 수 있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原因에 比例하지 않는 結果를 通해서는 原因에 대한 完全한 認識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結果에서도 原因이 있다는 것이 明白하게 우리에게는 論證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結果들에서 하느님이 存在한다 는 것을 論證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結果들을 通하여 하느님을 그 本質을 따라 完全하게 認識하 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그 結果들에서 論證할 수 있는 것이다.



㉡ 성 토마스는 물론 이 절에서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가톨릭교회 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인 하느님을 인간의 자연이성의 빛으로 창조된 사물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세상이 창 조된 이래 그 지으신 것을 통하여 이성의 눈에는 보입니다.”(로마 1,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인용된다.
이런 주장에는 또 다른 성서의 말씀 지혜 13,6-9의 말씀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하 나이고 참되며 창조주이고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창조된 것들을 통해 인간 이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확 실히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파문으로 배척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편다.
교황 피우스 10세는 그의 교서 ‘주님의 양의 사목’에서 근대주의자를 배척한다. 즉 관념적으로 칸트와 헤 겔철학에 속하는 근대주의, 일반적으로는 불가지론이라고 하는 근대주의를 배척한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인 간 이성의 빛으로 모든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의 인식을 넘어가는 세계가 있다. 하느님의 존재와 속성 인식에도 신앙의 계시가 필요한 점을 인정한다.
이성으로 탐구하여 알 수 있는 그런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고 또 가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오류가 뒤섞이게 된다. 하느님의 존재 문제 는 인간 구원의 중대사이며 그 기초이다.
따라서 인간 구원이 공통적으로 폭넓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 느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토마스는 이른바 전통주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다.
즉 인간 이성은 하느님의 존재와 그 밖의 다른 종교적인 자연적 진리들에 대해 인식능력이 없다는 전통주의자의 주장을 배척한다.




3.

증명은 다섯 가지 방식(quinquae viae)으로 할 수 있다:

A) 이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증적(evidens)이다. 많은 것들이 운동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움직여지지 않고서는 운동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스스로 가능 상태에서 존재 현실로 건너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달구어질 수 있는)차거운 쇳덩이는 스스로 열을 내지 못한다. 누군가가 열을 가해야지만 달궈지게 된다. 그러므로 운동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히 원인을 소급해 올라갈 수는 없다. 이것은 실제로 설명함이 없이 자꾸만 설명을 미루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 원동자(第一原動者, primum movens)' 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B) 우리는 일련의 능동인(causa efficiens) 들의 끝에 있는 결과들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하지 않았어야 하고 실존을 주기 위해서는 실존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명백히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차적 원인들을 추적하며 무한히 소급해 올라가는 것은 제일 원인을 부정하는 셈이 되고, 그 결과 제이 원인들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제이 원인들은'제일 원인(causa prima)' 없이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C)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은 하나의 우연유(偶然有. Contingentia)이다. 그것은 실존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전에 실존하지 않았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자(有, ens )들은 우연유들이다. 그러므로 과거 언젠가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며, 지금이라도, 만일 실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유(ens necessarium)'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실존하지 못할 것이다.

D)사물들속에는 선(善)이 있다. 그러나 선의 원천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더' 와 '덜'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체 선'인 자가 있다.

E)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은 놀랄 만큼 정밀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렇게 형상화한 자가. 즉 '최고 지성'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3節; 하느님은 存在하는가?

하느님은 存在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서로 矛盾되게 對立하는 것 中 하나가 無限한 것이라면 그 反對編의 다른 것은 全的으로 없 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이란 名稱에서는 어떤 無限한 善이 理解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存在한다고 假定한다면 어떠한 惡도 發見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事實은 惡이 世上에서 發見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存在하지 않는다.

② 그 밖에도 적은 數의 根源에서 成就될 수 있는 것은 많은 根源을 通해서 成就되는 것이 아니 다. 그런데 世界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存在하지 않는다고 假定할지라도 그 外의 다른 根 源에서 成就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自然的인 것들은 自然이라는 根源에 還元되고 意圖 로 말미암아 있는 것은 人間의 意志라는 根源에 還元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을 認定할 必要는 絶代로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탈출 3,14에서 하느님 自身이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存在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길로 論證될 수 있다.㉣ 첫째이며 더 明白한 길은 運動變化 에서 取해지는 길이다.㉤ 이 世界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確實하며 또 그것은 感覺으로 確認되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진다.㉥ 事實 어떤 것도 그 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에 대해 可能態에 있지 않는 限 움직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現實態에 있는 限 움직여 준다.
즉 움직여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을 可能態에서 現實態 로 移行시켜 가는 것 外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可能態에서 現實態로 이끌어지는 것은 現實態 에 있는 어떤 有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예컨대 더워질 可能性 안에 있는 나무는 現實的으로 더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이라는 現實的으로 더운 것이다. 불은 이런 現實的 더움을 通해 나무를 움직이며 變化시킨다.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觀點에서 同時에 現實態에 있으며 可能態에 있을 수 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觀點에서 可能하다. 예컨대 現實的으로 더운 것은 同時에 可能的으로 더 운 것일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은 同時에 可能的으로 찬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觀點에서 같은 樣態 로 어떤 것이 움직여 주는 것이며 움직여 주는 것, 혹은 自己 自身을 움직이는 것은 不可能하다.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 이게 되는 것은 그것이 또한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렇게 움직여 주는 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無限히 遡及해 갈 수는 없다.
그 理 由는 이런 境遇 어떤 첫 움직여 주는 者, 즉 第一動者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 여 주는 者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第二動者들은 第一動者한테서 움직여지는 것에 의 해서가 아니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지팡이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 지 않으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서 움직여 지지 않는 어떤 第一動者에 必然的으로 到達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存在를 하느님으 로 理解한다.㉦



㉢ 이 표현은 중요한 표현이다. 신학은 하느님의 이런 표현을 현실에서 고찰한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필연 적 존재로서 모든 존재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있을 뿐만 아니라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는 그것이 지니는 성격으로 인해 후험적 증명을 제공한다. 즉 세계는 그것이 지니는 성격에서 하느님 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또 그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전 우주는 그것을 요 구하고 그것을 강요하며 그것을 부과한다.

㉣ 토마스는 하느님의 존재를 이 절에서 증명한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선험적으로 하지 않고 후험적으로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있는 그대로에 대해 직접적이고 직관적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 여기서 전개되는 그의 논조는 우리 정신의 고유 하고 형상적 대상에 대한 그의 학설과 직결된다.
즉 우리 정신의 대상은 그 자체 무조건적으로 고찰된 존 재가 아니라 물리적 세계 안에 현실화된 존재이다. 이런 대상에서 인간 정신은 능동지성과 수동적 지성의 능력으로 추상을 통해 유 혹은 존재의 초월적 개념을 갖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의 인간 지성은 다음과 같 은 제약 하에 있다. 즉 유는 그 특성과 관계성에 있어 물리적 세계 안에서 사변된다. 이런 토마스 학설의 인식은 토마스의 신학을 깊여가려고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토마스의 神存在 증명은 그의 여러 저서들에 산재해 있지만 여기서는 그의 주저인 ‘神學大全’을 중심으로 논하고 각주 설명에서는 ‘이교도논박대전’도 곁들여 논하게 된다.
神學大全에 나타나는 神存在 증명의 다섯 길은 이 문제를 좀 더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다룬다. 그런데 이교도논박대전에서는 神存在 증명을 더 물리 적인 측면에서 전개하며 감각적 경험에 근거하여 논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神存在 증명의 핵심은 역시 물 리적인 측면보다 형이상학적 면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神存在 증명의 논증은 神學大全에서의 논증이 더 무게를 갖는 것이다. 토마스는 神存在 논증을 다섯 길로 논증한다.
즉 첫째는 運動에서이고 둘째는 能動 因에서이고 셋째는 偶然有에서이고 넷째는 完全性의 단계에서 다섯째는 秩序에서이다.
그러나 이런 다섯 길 은 서로 다른 다섯의 논증이라기보다는 단일한 논증의 다섯 면모라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 운동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어떤 이행이다. 즉 어떤 유에 있어서의 어떤 새로운 완성의 획득이다. 예컨대 양이나 열의 증가, 화학물질의 화합, 식물의 발아 내지는 결실, 대양이나 바람이나 星座의 운동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가능태 안에 있는 유의 가능태 안에 있는 한에서의 현실태’로 보았다.

라틴어의 motus는 운동과 변화를 말한다.
여기서는 이런 운동과 변화를 먼저 ⑴ 물리적 의미로 취할 수 있다. 이런 물리적 의미는 운동과 변화의 첫째이고 고유한 의미다. 이런 의미로서의 운동과 변화는 하나의 주체가 존재의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 생성의 경우이다. 이런 것을 통해 움직이는 주체가 하나의 실체적 형상 혹은 류적 본성을 얻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 변형의 경우이다. 이런 변형을 통해 주체가 하나의 질 혹 상태에서 다른 질 혹은 상태로 건너간다.
㈂ 위치변경 혹은 장소적 운동의 경우이다. 이것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공간 안에서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건너간다.
㈃ 加, 減의 경우이다. 이것을 통해 주체가 적은 것에서 많은 것으로 건너간다.

혹은 그 역이다. ⑵ 그리고 형의상학적 의미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운동과 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건 너감이어서 모든 생성과 변화에 존재론적으로 해당된다. 다시 말해 이런 운동과 변화의 근저에는 가능태에 서 현실태로, 가능존재에서 현실존재로의 건너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이 원리는 즉시 아래에 따라오는 것에서 명백하다. 즉 이런 원리는 유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기초개념에서 명백하다. 이런 개념들(현실태와 가능태)은 對되는 개념들이며 현실적으로 有限有를 구분한다.

㉦ 운동과 변화에서 취해지는 증명의 핵은 운동과 변화 자체의 깊은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 운동과 변화이든 상관없다. 즉 물리적인 것이든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운동변화는 물리적 운동 변화를 내포하며 그것을 넘어간다.
어떤 변화에 종속되고 또 어떤 세계에서 발견되는 운동 변화하는 모든 실재는 부동의 제1동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부동의 제1동자는 어떠한 가능태도 배제하는 동자이며 전적으로 현실 존재이다.
즉 순수현실존재이다. 그 어떤 형상으로 제시되든 간에 변화와 생성은 분명히 그 차체로서는 충 족하지 못한 실재이다. 물체계의 물리, 화학적 운동이건 생물계의 생명적 운동변화이건 더 높은 단계의 존 재의 정신적, 영성적 운동변화이건 다 자체 안에서는 충족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이루어지는 유는 그것과는 구별되는 일정한 작용적 원인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 여진다.’라는 원리는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에 제시된 것을 돕기 위해 좀 더 부연 설명 코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아주 넓은 의미의 운동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장소적 운동만이 아니 라 모든 가능유에서 현실유의 이행을 의미한다. 즉 변화일반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어떤 구체적, 경험적 운동만이 아니라 그런 운동에서 파악되는 형이상학적 운동까지도 의미한다.
그리고 운동을 일으키는 존재, 즉 동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물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 가는 모든 유를 의미한다. 또한 동자가 부 동적이라고 하는 것 즉 이런 불변성은 모든 것을 다 불변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새로 얻거 나 잃어버릴 수 없는 그런 완전성의 불변성, 그런 유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논증; 이 세계에 운동이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지며 그 다른 것의(他動者) 계열이 무한정으로 계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움직이는 것이 그것한테서 움직임 을 받는 어떤 부동적 제1동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동자를 하느님이라 한다.

대전제; 세계에 운동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삶의 경험에서 끊임없이 이 운동을 경험한다. 무기물, 무생물은 장소적 운동을 하고 생물은 생성소멸 한다. 생물은 장소작용뿐만 아니라 감각작용, 욕구작용을 한 다. 인간은 거기에 지성작용, 의지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모든 운동이 어떤 유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건너가는 데서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

소전제; 무엇이든지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며 이런 다른 것의(타동자)의 계열은 무한정으 로 계속될 수 없다. 이 소전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 그 어떤 것도 같은 관점에서 동 시에 현실태이며 가능태일 수 없다. 그런데 모든 움직이는 것은 가능태에 있는 것이고 움직여 주는 모든 것은 현실태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태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현실태에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움직여 주는 것이며 움직여지는 것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현실태와 가능태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스스로를 움직일 수는 없다.
㈁ 다른 것(움직여 주는 것)의 계열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명제의 이 부분을 논하여야 한다. 사실 우리가 精緻한 논리를 전개할 때 움직임을 받으며 다른 것을 움직여 주는 유의 계열을 무한히 연장하여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계열 밖에 운동의 부동 적 제1동자를 인정하지 않는 한 앞의 설명은 각개 사물 안에 시작되는 운동의 기원을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한테서 움직임을 받고 또 다른 것을 움직여 주는 동자는 그 계열이 무한히 연장 된다 할지라도 그런 동자는 그 어떤 것이든 중간동자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런 설명은 유래되어 오는 운동의 원인에 대해 근본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 사실 중간동자는 다른 것에서 더 이상 운동을 받지 않는 제1동자를 인정하지 않는 한 중간동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부동적 제1동자가 인정되 지 않으면 세계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게 된다.

결론; 그러므로 모든 움직이는 것이 그것한테서 움직임을 받는 어떤 부동적 제1동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부동적 제1동자의 내용을 고찰하면 그것은 순수현실존재 즉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동자는 현실존재이다. 왜 냐하면 현실로 있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동적 동자는 순 수현실존재이다.
가능태 안에 있는 현실유는 그 가능성이 지향하는 현실에 대해 움직일 수 있는 것, 즉 가 동적인 것 다시 말해 그런 현실로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동적 동자로서 현실존재는 더 이상 다른 현실을 지향할 수 없는 현실존재, 즉 다른 것에서 더 이상 움직임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 제하는 현실존재이다. 다시 말해 순수현실존재이다.
이런 순수현실존재는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부 동적 동자를 신학대전의 이 대목에서 하느님이라고 한다.



둘째 길은 能動人의 理由에서다.
事實 우리는 이 感覺系에 能動人들의 秩序(系列)가 있는 것을 發見한다.㉧
그런데 이런 世界에서는 그 어떤 것도 自己 自身의 能動人으로 發見되지 않으며 또 그 런 것은 可能하지도 않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假定한다면 그것은 自己 自身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것은 不可能한 것이기 때문이다.
事實 能動人들에 있어서 無限히 遡及해 갈 수는 없다. 그 理由는 모든 秩序지어진 能動人의 系列에 있어서㉨ 첫째 것은 中間 것의 原因이고 中間 것은 最終的 것의 原因이기 때문이다. 이때 中間 것이 많건 혹은 하나만 있건 그것은 關係없다. 그 런데 原因이 除去되면 結果도 除去된다.
그러므로 만일 能動人의 系列에 있어서 첫째 것이 存在하 지 않는다면 最終의 것도, 中間의 것도 存在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能動人들의 系列에 있어서 無 限히 遡及되어 간다면 第一能動人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最後의 結果도, 中間 能動人들도 없을 것 이다.
이것은 分明히 虛僞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第一能動人을 認定해야 하며 이런 存在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 우리는 이 세계의 무기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 등에 수많은 결과와 원인이 있음을 안다. 원인이 결과 를 발생시키고 보존하는 경우도 알고 있다. 원인이 없어질 때 결과도 사라지는 경우가 있음도 알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즉 본질적으로 질서지어진 원인들에 대한 것이다.

㉩ 능동인들은 그 어떤 것이든 다른 원인의 능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원인들도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결과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이 둘째 길의 하느님의 존재논증은 원인과 결과의 논증이다. 즉 능동인에서의 하느님의 존재논증이다. 이 논증은 하느님의 존재논증의 핵심부분이며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논증이다.
그것은 원인되어 온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경우 이런 과정이 무한히 소급해 갈 수 없고 반드시 원인되어 오지 않은 원 인 즉 무원인적 원인, 다시 말해 제1원인이 필요하다는 논증이다. 원인되어 오고 다른 것의 원인이 되는 원 인은 그 어떤 것이든 다 중간원인의 형태인데 중간원인은 시점과 종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간원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종점은 마지막 결과이다. 또한 이런 중간 원인은 자 체 안에 존재의 충족이유를 갖지 못하며 다른 것에서 그 존재이유를 갖게 된다. 그런데 중간원인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존재이유를 자체 내에 갖지 못하는 것이어서 존재이유 혹은 존재근거인 제1원인이 필요적으 로 요청된다.
이런 원인은 자체 안에 존재의 충족이유를 갖는 존재이다. 이것을 좀 더 이론적으로 명시하면 다음과 같은 논법이 전개된다.

둘째 길의 논증; 능동인에서의 제1능동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논증된다. 이 논증을 통해 우리는 세계안에 있는 능동인의 존재에서 하느님인 제1원인의 존재를 귀결 짓는다. 이 논증은 다음의 유연유에서의 논 증과 더블어 우주론적 논증‘이라고도 한다. 이 논증의 실재적 가치는 특히 현상론자에 의해 거부된다. D.흠 은 인과율의 가치를 심리적 요인, 즉 습관과 신념에 칸트는 순 정신의 범주에 환원시키며 순 경험계에만 적용시킨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연유하는 토마스는 철학과 전통 형이상학은 이 논증의 실재적 가치를 인정한다.

명제; 능동원인(능동인)에서 제1능동인인 하느님의 존재가 제시된다.

논증; 세계에는 능동인의 질서가 있다. 그런데 질서 지어진 많은 능동인이 있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제1원 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원인적 제1능동인 즉 하느님이 존재한다.

대전제; 대전제는 자명하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수많은 능동인의 계열을 경험한다. 예컨대 내가 방망이로 공을 친다면 움직인다. 이때 공은 방망이에 의해 움직이고 방망이는 내 손에, 내 손은 내 팔에 의해 움직이 고 내팔은 내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또 아들은 아버지한테서 있게 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서 … 등등 의 능동인 계열이 있다.

소전제; 계열을 갖는 자체원인들에 있어서 후행적 원인은 선행적 원인의 현실적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면 결과를 낼 수 없다. 이 경우는 자체 종속적 원인이다. 만일 선행적 원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후행적 원인 도 작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결과도 없을 것이다.

질서 지어지는 우연적 종속원인(아들은 출산행위에 있어서 그의 존재원인인 아버지의 협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도 모든 원인은 원인 되어온 원 인이며 존재하기 위해 그 자체로 충족하지 못하다. 따라서 이런 원인 중 그 어떤 것도 무원인적 제1원인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또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것은 자기의 원인으로 자 기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능동인들은 중간 원인의 성격을 지닌다. 중간원인은 전의 것에서 결과되어 오고 다른 것에 대해 영향을 미쳐 원인의 구실을 한다. 그런데 시점과 종점이 없으면 중간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계열에 있어서 첫째 것이 있어야 하며 이 첫째 것은 중간의 원인이며 중간은 끝의 것의 원이다. 그러므로 능동인에 있어 첫째의 것 즉 제1원인이 제거되면 끝의 것도 중간도 성립되지 못한다. 그 리고 능동인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되어 간다면 제1능동인이 없을 것이며 마지막 결과도 없겠다. 따라서 중 간능동인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허위이다.

결론; 그러므로 무원인적 제1능동인 즉 하느님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그 존재에 있어서 순수현실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제1능동인은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순수현실존재이다. 그렇지 않고 원인이 가능성을 내포하는 존재라면 그 가능성에서 현실로 이끌어 가는 또 다른 현실유를 전 제하게 되며 그것은 또 다시 가능태와 현실태로 설명되는 원인이 되어 무원인적 제1능동인, 즉 무원인적 제1원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길은 可能과 必然에서㉫ 取해진 것이다. 즉 우리는 事物世界에서 存在할 수도 있고 存在하 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發見한다. 그런 것들은 生成, 消滅하며 따라서 存在할 수도 存在하지 않 을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存在하는 모든 것은 恒常 存在할 수는 없다. 그것은 存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存在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때에는 事物界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 理由는 없는 것은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서가 아니면 存在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떠한 有가 없었다면 어떤 것도 存在하기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明白히 虛僞다. 그러므로 有가 可能한 것뿐일 수는 없고 事物界에 어떤 必然的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必然的인 것은 自己 必然性의 原理를 다른 데에 갖는 必然的인 것들의 系列에 있어서 遡及이 無限 히 進行되어 갈 수는 없다.
이것은 벌써 能動人의 境遇에서 證明된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自己 必 然性의 原因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必然性의 原因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自體로 必然的인 어떤 것을 認定할 必要가 있다. 이런 存在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 여기서 말하는 가능은 우연한 것, 우연적인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에 반대된다. 즉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반대된다.

㉬ 이 논증은 형이상학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 이 논증에서는 앞에서의 논증들에서처럼 원인의 작용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성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논증한다.
토마스는 우연유란 말을 쓰지 않 고 본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란 말을 썼지만 현대인들은 이 논증을 우연적 인 것들에서의 논증이라 한다.
우연적인 것들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것은 존재하기 위 해 내적으로 스스로 충족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즉 자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우유적인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충족한 것이며 분유적 유 혹은 참여적 유이며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되는 존재 혹은 타자의 존재 이다. 이와는 달리 필연적인 것은 본질에 의한 유 혹은 자체유이다. 따라서 이런 유는 비존재와는 단적으로 반대된다. 그러나 우연적인 것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중립적이다. 즉 우연적인 것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 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적인 것은 피조물의 속성이고 필연적인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우 연적인 것은 생성소멸하는 유이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작용할 수도 있고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정 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용은 외적 원인에 의해 장애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필연적인 것 은 지금 있는 그것과 달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유는 그 존재양식에 있어 불변적이며 확정적인 것 인데 그 본성상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소멸될 수 없으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어떠한 외적 힘으로부터도 장 애를 받을 수 없도록 확정적인 것이다. 생성소멸할 수 있는 것은 우연유라고 한다.

명제; 세계사물의 우연성에서 필연유의 이유로서의 하느님이 존재한다.

논증; 사물계에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체 필연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유를 하느님이라고 한다.

대전제; 우리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를 비롯하여 무기물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변화, 즉 생성소멸을 수없이 경험한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유를 만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는 유는 우연유이다.

소전제; 그런데 이런 우연유는 그 본성상 존재에 결정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자기 고유의 존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런 우연유는 그 자체 내에 존재의 충족이유를 갖지 못한다. 이런 우연유는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우연유는 그 자체로는 자체 내에 자기 존재의 충족이유를 갖지 못한다.

결론; 그러므로 우연유에는 다른 존재, 즉 어떤 원인에서부터 존재가 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원인은 우연 유가 그 존재를 받는 존재, 우연유가 아닌 존재, 우연유에 적합한 원인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존재 는 스스로 존재를 갖는 존재이어야 하며 자체 필연유이어야 한다.
즉 우연유가 존재를 받는 존재는 자체 필연유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토마스의 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생성소멸하는 것은 실재로 존재한다. 이런 것이 시간적 인지 영원한 것인지는 여기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것이 생성소멸하는 것으로서 다른 것으 로부터 유래되는 것뿐일 수는 없고 자존적 필연유가 있어야 한다.



넷째 길은 事物界에 發見되는 段階에서 取해진다. 事實 事物界에서는 善性과 眞性과 高尙性에 있어서 더하고 덜한 事物들이 發見된다.
또 善, 眞, 高尙 外의 다른 것들에 對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 나 서로 여러 事物들에 對해 더하고 덜하다고 하는 것은 最高度로 있는 어떤 것에 여러 가지 模樣 으로 接近하는 데 따라 말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最高度로 더운 것에 더 가까운 것이 더 더운 것이 다. 따라서 가장 眞實되고 가장 善하고 가장 高尙한 것, 따라서 最高度의 有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形而上學’ 2券에서도 말하는 바와 같이 最高度로 眞인 것은 最高度로 有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領域에 있어서 最高度의 것으로 불리는 것은 그 領域에 속하는 모든 것의 原因이다. 예컨대 最高度로 더운 불은 모든 더운 것들의 原因이다.
이것은 ‘形而上學’에서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어 떤 事物의 境遇이든 그 存在와 善性과 모든 完全性의 原因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런 存在를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 이 세계사물계는 완전성의 여러 단계가 있다.
예컨대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생물은 다 생명력을 갖고 있지 만 그 모든 생물이 생명의 같은 완전성이나 같은 단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감각적 생명은 식물의 영양적 혹은 생장적 생명보다는 좋은 것이며 인간의 이성적 생명은 감각적 생명보다는 좋은 것이다. 토마 스는 이런 완전성의 여러 단계에서 그 최고단계 즉 하느님의 존재가 결론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증을 단계적 논증 또는 통일성의 논증이라고도 한다.

명제; 세계 내의 완전성의 단계에서 최고자의 존재이유로 인해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된 다.
넷째 길은 사물계에서 발견되는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사물계에 더 크고 작은 어떤 좋은 것, 참된 것, 고상한 것이 발견된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것은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접근하는 데 따른 것이다.
즉 더 덥다는 것은 최고도로 뜨거운 것에 더욱 접근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참되고 가장 고상한 것은 최고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의 경우이든 그 존재와 선과 모든 완전성의 원인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 님이라고 부른다.



다섯째 길은 事物들의 統治에서 取해진다.
사실 우리는 認識을 갖지 못하는 事物들, 즉 自然的 物體들이 目的 때문에 作用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自然物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恒常 혹은 자주 같은 模樣으로 作用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偶然에서가 아니라 어떤 意 圖에서부터 目的에 到達하는 것이 明白하다. 그런데 認識을 갖지 않는 것들은 認識하며 깨닫는 어 떤 存在에 의해 指揮되지 않으면 目的을 指向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弓手에 의해 指揮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自然的 事物을 目的에로 秩序지어주는 어떤 知性的 存在가 있다. 이 런 存在를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대전제; 우리는 사물계에 여러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 특히 진리와 선과 존재에 있어서 그렇다.
⑴ 사물계에는 크고 작은 진리가 있다. 존재론적 진리에 있어서 그렇다. 토마스의 견해에 따르면 존재론적 진 리는 사물의 존재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사물의 존재를 산출하는 원형과의 합치에서 성립된다.
즉 사 물은 그 원형 혹은 모형에 접근되는 정도에 따라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참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그 원형에 합치하면 할수록 더욱 참되다. 논리적 진리 즉 인식론적 진리에 있어 모순원리의 진리는 다른 원리 의 진리보다 크다.
왜냐하면 모순원리는 다른 원리에 기초를 주며 모든 원리 중 가장 자명한 것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물리학적 확실성에 있어서의 진리는 논리학적 확실성에 있어서의 진리보다 크며 어떠한 예외 도 허락하지 않는 형이상학의 확실성에 있어서의 진리는 물리학적 확실성에 있어서의 진리보다 크다.

⑵ 또 고상함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동물은 식물보다 고상하며 인간은 동물보다 고상하며 세계 사물 중에서도 고상하다.

⑶ 좋음, 즉 선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식물의 열매보다는 동물의 새끼가 더 좋은 것이고 동물보다는 인간이 더 좋은 것이다. 또 사람은 감각적 욕구의 충족보다는 정신적 욕구의 충족, 즉 물질적 선보다는 정신적 선을 더 좋은 것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선의 세계에 있어서도 더하고 덜함의 단계가 있다.

⑷ 존재에 있어서도 그렇다. 사실 존재는 모든 것의 초석적 완전이며 모든 완전의 완전이다. 어떤 존재는 실제계에 있어 크고 작은 완전성을 제시한다. 즉 광물은 생명 있는 식물보다 그 존재론적 완 전성이 자고 식물은 동물보다 작고 동물은 인간보다 작다.

소전제; 그런데 더하고 덜한 완전성의 단계는 어떤 완전성의 일성에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단계 안에 나타나는 완전성은 자체가 아니고 말하자면 완전성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된 것이다. 그것은 선 자체는 아니지만 어떤 선이다. 즉 선의 충만성을 缺한 선 의 분유 즉 선에의 참여이다.
그러므로 그런 선성 혹은 완전성은 그 자체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자체로서 순수가지적이며 절대로 최고인 어떤 첫째 것과 관련시킴으로써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것은 그 본질상 최고인 것과 관련된다.
즉 단계적인 것은 주관적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그 본성상의 필연성 때문에 최고의 것과 관련시키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최고의 것을 내포적으 로 인정하지 않고는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결론; 그러므로 최고의 것은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최고의 것은 안셀무스의 본체론적 논증에 나타 나는 바와 같은 순 개념상의 문제가 아니다.
단계적인 것이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천 혹은 원 인으로 요청되는 최고의 것도 실재이어야 한다. 또 이와 같이 최고인 것 예컨대 최고로 선한 것, 최고로 참 된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즉 이런 존재는 최고로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존재는 최고로 존재하는 것, 즉 최고 존재이다. 토마스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한다.

토마스는 이런 최고 존재를 만물의 능동인으로 설명하며 최고 존재는 만물의 모형인 즉 원형인으로 생각 한다. 만물은 그런 원형의 모방으로 성립된다. 이런 최고 완전의 모방은 그 완전성의 분유 혹은 참여이다. 그러므로 이런 완전성의 개념은 일의적이거나 다의적이 아니고 유비적인 것이다.

이 논증의 플라톤의 이데아론과의 비교;
이 넷째 길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매우 비슷한 면을 갖고 있으며 그의 사고방식에서 발전한 것도 사실 이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최고 이념, 예컨대 最高眞, 最高善, 最高美 등 초월적 완전성을 이데아 계에 인정하였으나 그런 최고 완전성은 각기 구별되는 것으로 하나인 것에로 귀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있어서는 최고 완전성은 결국 최고 존재로 귀결되어야 한다.

㉠ 이 논증은 세계의 명백한 질서에서 최고로 질서를 주는 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이다. 이런 존재를 하느 님이라고 한다.

명제; 세계의 질서에서 그런 질서를 주는 최고자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인정된다.
다섯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 설명된다. 우리는 인식을 갖지 않는 사물들, 즉 자연물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안다. 이 런 것은 자연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 의해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명백하다.
사실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이 어떤 지성적 존재의 지휘를 받지 않고서는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 이 궁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자연적 사물을 목적에로 질서지어 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提要’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最高로 善하시기 때문에 惡에서도 좋은 것을 行하실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 느님이 全能하시며 善하지 않으신다면 당신의 業안에 惡의 存在를 결코 許容치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惡의 存在를 許容하고 惡에서 善을 이끌어 내는 것은 하느님의 善性에 속하는 것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自然本性은 어떤 더 上位의 作用者의 指揮에 의해 一定한 目的을 위해 作用하는 것이기 때문에 自然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第一原因으로서의 하느님 께로 還元시킬 必要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意圖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더 높은 原因에로 還元될 必要가 있다.
이런 原因은 물론 人間的 理性이나 意志가 아닐 것이다. 그 理由는 이런 것들은 變할 수 있는 것들이고 不完全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일 수 있는 것과 存在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떤 不動的이며 그 自體로 必然的인 第一原理(根源)에까지 遡及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이다.


※ 참고



◇ 흠 등 心理的 因果觀에 대한 批判

原因의 觀念과 因果律이 現象의 反復에서만 由來한다고 說明되는 것이라면 現象의 모든 港口한 反復은 因果觀念을 完全히 說明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主張은 完璧한 誤謬이다. 예컨대 밤은 낮에 선행하나 밤은 낮의 原因이 아니다.
時間表의 配列, 달력의 配列도 마찬가지다. ‘이것 다음에 存在한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存在한다.’라는 論證은 成立되지 않으며 이 主張은 서로 다른 것이다. 前者는 因果的 連結이 없으나 後者는 그런 連結이 있다. 事實 因果律은 心理的인 것이 아니라 客觀事物에 根據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認識經驗에서 確信한다.
더 나아가 因果律의 客觀的 價値를 否定하면 學文, 특히 自然科學이 成立될 수 없다. 自然科學은 客觀的 價値를 갖는 因果律에 根據한 다. 또한 因果律의 客觀的 價値가 否定되면 倫理的 價値도 그 存在論的 根據를 잃어버리게 되어 倫 理的 삶에 큰 混亂을 惹起시킨다. 즉 因果律이 拒否될 때 어떤 倫理行爲에 對해서도 그 責任을 물 을 수 없게 된다.

◇ 칸트적 인과율설과 그것에 대한 비판

① 學說; 칸트는 現象界에 因果律의 普遍的이고 必然的인 價値를 認識하며 이것을 그의 認識說로 說明한다. 原因槪念은 先驗的 帆柱이며 主觀的 現狀이다. 因果律은 先驗的, 綜合的 原理이다. 綜合的 이라고 하는 것은 說明語가 主語 안에 內包되지 않기 때문이며 先驗的이라고 하는 것은 說明語가 經驗에서 由來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 있어 因果律은 다른 先驗的 綜合判斷과 같이 現象界에만 適用되고 物自體界에는 適用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普遍的이고 必然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意識이 必然的으로 그렇게 因果槪念, 즉 因果律을 構成하기 때문이다.

② 批判; 原因槪念을 우리는 經驗을 通해 後驗的으로 얻는다. 즉 우리는 우리의 內的, 外的 삶의 經驗에서 知性作用으로 原因槪念을 갖게 된다. 知性 機能은 感覺的 所與를 反省하고 그것을 說明한 다. 因果律은 역시 綜合的이기보다는 分析的이다. 왜냐하면 因果律의 形式 ‘存在하기 시작한 것은 그 充足原因을 갖는다.’ 혹은 ‘偶然的으로 存在하는 것은 그 充足原因을 갖는다.’에 있어 그 主語 ‘存 在하기 시작하는 것’ 혹은 ‘偶然的으로 存在하는 것’ 안에 說明語가 明示的으로 혹은 形象으로는 아 닐지라도 內包的으로 혹은 潛勢的으로 內包되어 있다. 즉 그런 說明語가 主語의 本質을 構成하는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本質에서 必然的으로 挑出되는 것으로서 主語 안에 包含된다.
이것은 主語(主 體)의 分析에서 그 說明語가 解明된다. 따라서 因果律은 自明原理, 즉 分析的인 原理이기에 充分한 說明을 갖는다. 事實 說明語가 主體의 本質에서 必然的으로 挑出되는 것이 分明하면 그런 說明語는 普遍的으로 또 必然的으로 主體에 敍述된다.


◇ 현대 물리학의 인과율

① 學說; 現代의 一部 物理學者들은 因果律을 否定한다. 그들은 因果律을 古典 物理學의 決定律 과 同一시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가 不確定性의 原理를 主張한 後 因果律의 價値는 사라지고 物 理的 法則은 統計的이라는 것이다.

② 批判; 哲學的 因果律은 古典 物理學의 決定律과도 다르고 現代 物理學의 不確定性 原理와도 다르다. 그렇다고 그것들과 反對되는 것도 아니다. 哲學的 因果律은 個別的, 具體的 原因이 어떤 것 이며 一定한 具體的 結果를 어떻게 내는지를 決定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有限有 혹은 偶然有는 存 在하기 위해 原因을 必要로 한다는 것만을 主張한다.
이런 觀點에서 哲學的 因果律은 物理學的 모 든 法則 즉 決定律이나 不確定性 原理에 모두 適用된다. 物理學의 原理가 그 어떤 것이든 거기에 相應하는 原因은 있게 마련이다.

第三問


: 神의 單純性



1.

신은 물체(corpus)가 아니다.
A)물체는 움직여져야만 움직이게 되는데, 신은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primum movens immobile)'이기 때문이고.
B)물체는 변화에 매여 있는데, 신은 불변이기 때문이며,
c)물체는 영(spiritus)보다 덜 고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가장 고귀하므로 더 더욱 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第三問題 (全8節)


하느님의 單純性에 對하여

어떤 것에 對해 그것이 存在하는 지를 認識한 後 남는 것은 그것에 對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對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무엇이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에 對하여 어떻게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떻게 있지 않는지를 考察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하느님이 어떻게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認識 되는지, 셋째로는 하느님이 어떻게 命名되는지를 考察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에 對해 그가 어떻게 있지 않는지를 드러내는 것은 그에게 適合하지 않은 것들, 즉 合成(複合), 運動, 다른 이와 같은 것들을 除去함으로써 可能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하느님의 單純性에 대해 探究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런 單純性을 通해 하느님께로부터 合成이 除去되는 것이다.
또한 物體的 事物界에서 單純한 것들이란 不完全하고 部分的인 것들이므로 둘째로는 하느님의 完全性에 대해 探究해야 할 것이며 셋째로는 그의 無限性에 대해, 넷째로는 그 不變性에 대해 , 다 섯째는 그 一性(單一性)에 대해 물어야 한다.

1節; 하느님은 物體인가?

하느님은 物體인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物體는 3次元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聖書는 하느님께 3次元的 格變化를 歸屬시킨다. 욥 기 11,8에서는 말한다. “그것이 하늘보다 높은데 자네가 어찌하겠는가?
저승보다 깊은데 자네가 어 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다.

② 그 밖에도 形象이 있는 것은 物體다. 그것은 形象이 量的인 것을 規定하는 性質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創世 1,26¹에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記錄되어 있기 때 문에 하느님은 形象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事實 形象은 히브 1,3¹을 따라 模襲을 말한다. “아드님 은 하느님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즉 模襲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다.

③ 그 밖에도 物體的 部分들을 갖는 것은 다 物體다. 그런데 聖書는 物體的 部分들을 하느님께 歸屬시킨다. 욥기 40,4에서는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이라 한다. 또 詩篇 34,16¹에서는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라 하며 118,16에서는 “주님의 오른손이 드높이 들리시고 주님 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다. ④ 그 밖에도 位置㉡ 혹은 位置的 狀態는 다만 物體에만 適合하다.
그런데 이런 位置的 狀態에 관한 것들이 聖書에서 하느님에 대해 言及된다. 이사 6,1²에서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 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라고 하며 또 이사 3,13¹에서는 “주님께서 재판하러 일어서신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다.

⑤ 그 밖에도 어떤 것도 物體거나 物體的인 어떤 것이 아니면 거기에서 出發하고 그리로 向하는 場所的 指點일 수 없다.
그런데 聖書의 하느님은 그리로 向하는 것으로서의 場所的 指點이다.
그것은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라고 한 詩篇 34,6의 말 씀에 따라 그렇다. 예레 17,3에서는 “당신한테서 떠나가는 자들은 흙에 기록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요한 4,24에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絶代로 物體가 아니다.㉢ 이는 세 가지로 提示될 수 있다.
첫째로는 그것은 어떠한 物體 도 스스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것으로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箇箇의 事例 에 비추어 明白하다. 앞에서도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하느님은 不動의 第一動者이다. 따라서 하느 님은 物體가 아닌 것이 分明하다.

둘째로는 第一有는 現實態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결코 可能態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 이다.
事實 可能態에서 現實態로 건너가는 同一한 것에 있어서는 可能態가 現實態에 先行할지라도 端的으로 現實態가 可能態에 先行한다.
그 理由는 可能態에 있는 것은 現實的인 有에 意하지 않고 서는 現實態로 이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第1有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提示되었 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可能態에 있는 것은 不可能하다.
그런데 모든 物體는 可 能態에 있다. 그 理由는 連續的인 것은 그런 것으로서는 無限히 分割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物體일 수는 없다.㉣

셋째로 하느님은 有들 중에서 가장 高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에서도 明白하 다. 어떤 物體가 有들 중에서 가장 高貴한 것일 수는 없다.
그 理由는 다음과 같다.
物體는 生物體 거나 無生物體다. 生物體가 無生物體보다 高貴한 것은 分明하다. 그런데 生物體는 物體인 限 사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物體는 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을 營爲하고 있는 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 肉體가 魂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다. 物 體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는 그것은 物體보다 高貴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物體라는 것은 不可能하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聖書는 우리에 게 靈的인 것들과 神的인 것들을 物體的인 것들의 類似로 전한다. 따라서 하느님께 3次元을 歸屬시 킴으로써 하느님의 能力의 量을 物體的 量의 類似로써 나타낸다.㉤ 예컨대 감추어진 것을 認識하기 위한 能力을 깊이를 통해, 萬物을 超越하는 그 能力의 卓越性을 높이를 통해, 그 存在의 持續性을 길이를 통해, 萬物에 대한 사랑의 情을 넓이를 통해 나타낸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가 ‘神名論’ 9章 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깊이를 통해서는 그의 本質의 알아들을 수 없음이, 길이를 통해서 는 모든 것에 浸透하는 그의 能力의 發出이, 그리고 넓이를 통해서는 萬物을 그 保護 밑에 감싼다 는 意味로서 萬物 위에 있는 하느님의 덮음이 理解된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模襲을 따라 存在한다는 것은 物體 的 意味가 아니고 오히려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動物을 凌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創世 1,26에서도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한 後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 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添加한 다. 그런데 人間이 모든 다른 動物을 凌駕하는 것은 理性과 知性에 關한 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의 模襲에 따라 存在하는 것은 非物體的인 知性과 理性에 의한 것이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聖書에서 하느님에게 物體的 部分들을 歸屬시키는 것은 어떤 類似性에 의해 하느님의 作用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예컨대 눈의 作用은 보는 것인데 눈이 하느님에 대해 말해지는 것은 感覺的으로가 아니라 知性的으로 보기 위한 하느님의 能力을 意味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部分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 넷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場所的 狀態에 關係되는 것도 다만 어떤 類似로만 하느님께 歸屬된다. 예컨대 하느님이 앉아 계시다는 것은 그의 不動性과 權威 때문이며 일어선다는 것은 拒逆하는 모든 것을 征服하기 위한 그의 굳셈 때문이다.

→ 다섯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은 어디든지 存在(偏在)하기 때문에 身體的 걸음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며 오직 마음의 움직임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또 하느 님에게서 멀어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場所的 運動의 類似性 下에서의 接近과 멀어짐은 靈的 움직임을 나타낸다.



㉡ 위치 혹은 위치적 상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 중 하나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그것은 장소 안에서 물 체의 부분들의 질서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것이다.

㉢ 물체는 제1질료와 실체적 형상으로 합성된 실체이다. 즉 연장의 요청 다시 말해 3차원의 요청으로 말미암 아 제1질료와 실체적 형상으로 합성된 실체이다.

㉣ 연속적인 것들은 그것들의 최종점들이 하나인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6권에서 連續量, 선, 면, 수학적 물체 즉 입체는 수학적으로 생각할 때 연장적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분할될 수 있다. 사실 수학적 물체에 있어서는 양만이 고려된다. 이런 양에서는 무한한 분할에 반대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 능력의 양은 어떤 본성이나 형상 등의 완전성에 따라 고찰된다.




2.

질료(material)는 그것으로 사물들이 구성된 그것이고, 형상(forma)은 각 사물에 그 고유 존재를 주는 그것이다.
그런데 신은 질료와 형상으로 복합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물체가 아니므로, '질료를 가지지 않는다.
b)형상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1)형상으로부터 그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은 형상 때문에 어떤 선이지만, 신은 선 자체이기 때문이다.:

(2) 만일 어떤 것이 그 존재를 형상으로부터 받게 되면 운동을 갖는다. 즉 형상 때문에 움직인다. 그런데 신은 운동의 원리이다. 따라서 형상을 '가진다'기보다는 형상 그 자체이다.

2節; 하느님 안에 形相과 質料의 合性이 있는가?

하느님 안에 形相과 質料의 合性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魂을 갖는 모든 것은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되어 있다. 그 理由는 魂이 肉體의 形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聖書는 하느님께 魂을 歸屬시킨다. 히브 10,38에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고 한 하느님 自身의 말씀이 紹介된다. 따라서 하느님은 質料와 形象으로 合性되어 있다.

② 그 밖에도 ‘魂論’ 1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忿怒, 즐거움 등은 이 두 要因의 結合의 情念이다. 그런데 聖書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것들이 하느님께 歸屬된다.
詩篇 106,40에서 “주님의 분노가 당신 백성을 거슬러 타오르고 당신의 소유를 혐오하게 되셨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質料 와 形相으로 合性되어 있다.

③ 그 밖에도 類는 個體化의 原理(根源)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個體로 보인다. 그것은 하느님이 많은 것들에 對해 敍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 모든 것은 物體다.
그것은 質料에 먼저 內屬하는 것은 次元的 量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物體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提示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質料와 形相 에서 合性되지 않았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 안에 質料가 있다는 것은 不可能하다.
첫째로 質料는 可能態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提示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어떠한 可能性도 갖지 않는 純粹 現實態이다. 따라서 하느 님은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 것이 아니다.
둘째로 質料와 形相으로 合成된 모든 것은 그 形相을 通해 完成되고 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은 質料가 形相을 分有하는 데 따라 分有로㉦ 말미암아 善이어야 한다. 그런데 善인 第一의 것, 最高로 善한 것, 즉 하느님은 分有로 말미암은 善이 아니다.
그 理由는 本質에 의한 善은 分有에 의한 善보다 先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다는 것은 不可能한 것 이다.
셋째로 作用者는 어떤 것이든 모두 그 形相을 통하여 作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形相을 갖는 데 따라 作用者로서의 性格도 갖는다. 그러므로 첫째이며 스스로에 의한 作用者는 첫째로 또 스스 로에 의한 形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미 앞에서 提示된 바와 같이 第一能動因이기 때문에 第一 作用者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自己 本質에 의한 形相이며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魂은 作用의 類似를 通해 하느님께 歸屬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원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뜻에 즐거운 것은 하느님의 마음(魂)에 즐거운 것이라고 말해진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忿怒와 이와 비슷한 것들은 結果의 類似性에 의해 하느님께 歸屬된다. 忿怒한 사람의 特性은 벌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忿怒가 隱喩的으로 벌이라고 불 린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質料 안에 받아질 수 있는 形相들은 質料로 말미암 아 個體化된다. 質料는 다른 것 안에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質料는 窮極的인 第一主體이기 때문 이다. 그런데 形相은 어떤 것이 妨害하지 않는 限 그 自體로서는 많은 것한테서 받아들여질 수 있 다. 그런데 質料 안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形相, 自體로 存立하는 形相은 다른 것 안에 받아질 수 없는 것 自體에서 個體化된다.
이런 形相은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質料를 갖는다는 結論은 나오지 않는다.



㉥ 물체적인 모든 사물은 제1질료와 실체적 형상으로 구성된다.
제1질료는 제1주체인데 항상 같은 것으로 지 속된다. 또한 물체적 모든 사물이 이를테면 어떤 규정적인 것에 의해 내적으로 합성된다. 실체적 형상은 질 료와 제1현실태이다. 이런 실체적 형상 즉 질료와 제1현실태로 말미암아 물체적 사물은 그 고유한 종에로 규정된다. 물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다. 그러나 이런 설을 모든 철학자들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아비케브론은 신령한 실체들은 신령한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하느님이 물 체는 아닐지라도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 학자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分受, 즉 나누어 받는다는 뜻으로 쓰고 한국에서는 分有로 써 왔으며 일본에서 도 分有로 쓴다.
우리는 어떤 개별체를 볼 때 어떤 것의 한 부분을 받아 나누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分身, 分校, 分家, 分權 등등으로 표현하며 개별체를 넘어 근원 내지 전체와의 관련에서 볼 때 참여로 쓰는 것이 통상이다. 분유설의 최고 권위인 C. Fabro 교수는 participatio설의 핵심부분인 ‘본질에 의한 존재’와 ‘분유에 의한 존재’의 관계를 인과원리로 설명함으로써 후자의 전자로부터의 유래성과 분여 받음을 명백히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학설의 저류에 참여의 개념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이 알게 된다. 즉 분유는 참여 속 에 있는 것이다. 그는 양자의 같음과 다름을 유비로 설명한다. ‘분유에 의한 존재’에는 존재론적으로 ‘본질 에 의한 존재’ 즉 그 근원에의 참여가 자리한다.

㉧ “사실 사물이 처음으로 작용하는 것은 형상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런 형상은 작용이 주어지는 것의 형상이 다. 그리고 그런 이유는 그 어떤 것도 현실태로 있는 데 근거해서가 아니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사물은 현실태로 있는 데 근거하여 작용한다.”(76문제 1항)




3.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인간은 인간성(humanitas)을 지닌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인간성인 것은 아니다[즉 다른 데에서부터 그 인간 본성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질료와 형상의 구성체가 아닌 신은 '신성(divinitas)'이다. 따라서 신은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이다.

3節; 하느님과 그 本質 혹은 本性은 같은 것인가?

하느님은 그 本質 혹은 本性과 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어떤 것도 自體 안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本質 혹은 本性, 즉 神性은 하느 님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本質 혹은 本性과 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② 그 밖에도 結果는 그 原因과 비슷하다. 그것은 모든 作用者는 自己에게 비슷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被造物界에 있어서 自主體는 그 本性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예컨대 人間은 그 人間 性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도 그 神聖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하느님은 生命이라 불린다.
그것은 살고 있는 者라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요한 14,6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는 데서도 明白하다. 그런데 生命이 살고 있는 者에 對한 것은 神 性이 하느님께 對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神性 自體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그 本質 혹은 本性과 같다. 이것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것을 알아야 한다.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된 事物에 있어서는 本性 혹은 本質과 自主體는 必然的으로 다른 것이다.
그 理由 는 本質 혹은 本性은 種의 定議 안에 內包된 것만을 自體 안에 包含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人間性 은 人間의 정의에 內包되는 것을 自體 안에 包含한다. 事實 이로써 人間이 人間인 것이다. 人間性은 이것을 意味한다.
그런데 個體的 質料는 質料를 個體化시키는 모든 遇有와 마찬가지로 種의 定議 안에 內包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살, 이 뼈 등과 이 質料를 指定하는 遇有들은 人間性 안에 包含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人間인 것에 內包된다. 따라서 人間인 것은 自體 안에 人間性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人間과 人間性은 全的으로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人 間性은 人間의 形相的 部分으로 意味된다. 그 理由는 定議라는 原理(要素)들은 個別化의 質料의 觀 點에서 본다면 形相的인 位置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되지 않은 것들, 따라서 個體的 質料, 즉 이 質料로 말미암아 個 體化가 이루어지지 않고 形相 自體들이 個體化되는 것들에 있어서는 形相 自體들이 自立的 自主體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있어서는 自主體와 本性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같은 模樣으 로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하느님은 質料와 形相으로 合性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 神性이며 그 生命이어야 한다. 이렇게 다른 어떤 것이든 하느님께 敍述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單純한 事物들에 대해 말할 때도 우 리는 우리가 認識을 갖는 合性된 事物들의 樣式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하느님의 自立性을 意味하기 위해 具體名師를 使用한다. 그것은 우리 世界에 있어서 自立하는 것들은 合性된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單純性을 意味하기 위해 抽 象名詞를 使用한다. 그러므로 神聖 혹은 生命 혹은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한 다면 그것은 우리 知性 把握에 成立되는 多樣性에 관한 것이지 事物의 多樣性에 관한 것이 아니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의 結果들은 하느님을 完全하게 模倣하지 못 하고 다만 可能한 限 模倣하는 것이다. 單純하고 一인 것을 多에 의해서가 아니면 表象할 수 없다 고 하는 것도 模倣의 缺陷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模倣物들에서는 自主體가 本性과 같지 않게 되는 合性이 생기게 된다.



㉨ 이 점에 있어 천사와 하느님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천사는 본질과 존재의 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느 님과 구별된다.



4.

아니 오히려, 신에게 있어서는 본질(essentia)과 존재(esse)가 동일하다.
인간의 경우처럼 존재와 5. 본질이 구별되는 경우엔 늘 어떤 원인을 갖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원인 받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또 존재가 본질을 구현하는 경우[이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구성 조건이다].
본래 가능태인 본질은, 존재로부터 분리되게 되면, [현실적으로]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말했듯이 신은 본질상 유(有, Ens)이다.

4節; 하느님 안에서 本質과 存在는 같은가?㉩

하느님 안에서 本質과 存在는 같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① 本質과 存在가 같다면 神的 存在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添加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런 添加도 할 수 없는 存在는 모든 것에 대해 敍述될 수 있는 共通的 存在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에 敍述될 수 있는 共通的 存在일 것이라는 結論이 따른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만 가질 수 있는 이름을 돌과 나뭇조각에 붙였다.”라는 智慧 14,21²의 말대로 虛位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存 在는 그의 本質이 아니다.

② 그 밖에도 우리는 하느님에 對해 그가 存在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 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存在와 그가 무엇인가 즉 何性 혹은 本性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힐라리우스는㉪ ‘三位一體論’ 7券에서 “하느님 안에 있어서 存在는 遇有가 아니고 自立하는 眞理 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는 自立(自存)하는 것이 그 存在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앞에서 이미 提示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그 本質일 뿐만 아니라 또한 存在이다. 그 理由는 다음 과 같이 여러 가지로 提示될 수 있다.

첫째로 本質 밖에 있는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原因된 것이어야 하는데 예컨대 種을 따 르는 固有한 遇有들,㉫ 즉 人間 本性에 由來하며 種의 本質的 原理에서 原因되는 웃음이라는 行爲와 같이 本質的 原理에서 原因되거나 혹은 물의 熱이 불에서 原因되는 것처럼㉬ 어떤 外部的인 것에서 原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事物의 存在 自體가 그 事物의 本質과 다른 것이라면 그 事物의 存在는 必然的으로 다른 外部的인 것에서 原因되거나 아니면 그 事物의 本質的 原理(要素)에서 原 因될 것이다. 그런데 事物의 存在가 다만 그 本質的 原理에서 原因된다는 것은 不可能하다.
그 理由 는 어떠한 事物도 그것이 原因된 存在를 갖는 限, 自己에게 自己 存在의 充分한 原因이 되지 못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存在가 그 本質과 다른 事物은 그 事物과 다른 것에서 原因되어야 한다. 이 런 것을 하느님에 對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第一能動因이라고 하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는 存在와 本質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없다.

둘째로 存在는 모든 形相 혹은 本性의 現實性이기 때문이다. 事實 善性, 혹은 人間性은 우리가 그런 것을 存在하는 것으로 意味하지 않는 限,㉭ 現實態 안에 있는 것으로 意味되지 않는다. 그러므 로 存在 自體는 現實態가 可能態에 比較되는 것처럼 存在와는 다른 本質과 比較되어야 한다. 앞에 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하느님 안에는 아무것도 可能的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의 本質은 存在 自體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歸結이 따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本質은 그의 存在다.

셋째로 예컨대 불을 갖고 있지만 불이 아닌 것은 分有에 의해 불을 받은 것과 같이 存在를 갖고 있지만 存在가 아닌 것은 分有에 의한 有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하느님은 自 己 本質인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만일 自己 存在가 아니라면 그는 分有에 의한 有일 것이며 本 質에 의한 有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第1有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不條理하 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自己 存在며 自己 本質만은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添加될 수 없는 어떤 것은 두 가지 模樣으로 理解될 수 있다. 그 한 境遇는 어떤 것에 添加되지 않는 것은 그것의 理由(槪念)에 의해 서다. 예컨대 非理性的 動物의 槪念에는 理性이 없다는 槪念이 內包된다. 다른 境遇는 添加가 되지않는 어떤 것이라고 하지만 添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事物의 理由 안에 內包되어 있는 것이 아닌 境遇다. 예컨대 動物一般이 理性이 없다는 것은 動物一般의 槪念에는 理性을 갖는다는 것이 內包되어 있지 않다는 데 不過한 것이고 理性이 缺如되어 있다는 것이 그 槪念에 內包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첫째 樣態로서의 添加가 없는 存在는 神的 存在이고 둘째 樣態로서의 添加 가 없는 存在는 共通的 存在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存在는 두 가지로 말해진다. 그 하나는 存在의 現實 態를 意味하고 다른 하나는 命題의 結合을 意味한다. 이런 結合은 知性이 述語를 主語에 結付시키 는 데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存在를 첫째 樣態로 받아들임으로써는 하느님의 存在를 알 수 없으며 또한 그의 本質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둘째 樣態로써만 알 수 있다. 事實 우리는 하느 님이 存在한다고 말할 때 하느님에 對해 形成하는 이 命題가 참(眞)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것 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提示한 바와 같이 結果에서 아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본질과 존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함이 좋을 것이다. 본질은 그것을 통해서 또 그것 안 에서 사물이 존재를 갖는다는 데 근거하여 지칭된다. 그런데 존재, 즉 실재는 본질적인 현실태이다. 즉 존 재는 사물이 실재의 질서에 있어 원인 밖에 그것으로 성립되는 바로 그것이다. 존재는 전적으로 단순한 개 념이다. 또한 有도 그것이 존재에서 지칭되는 한 단순한 개념이라고 지칭된다. 그런데 유는 정확히 말해 그 것이 있는 것으로서의 본질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본질이 있게 되는 존재의 두 요인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본질과 존재가 같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구별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 힐라리우스(315-366년)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라틴 교부이며 아리안 이단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 다.

㉫ 고유한 우유는 우유적 고유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겠다. 고유성은 포르피리우스(232-305)에 의하면 오직 모 든 종에게 항상 적합한 것이다.

㉬ 우유는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 밖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과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것도 아니다.

㉭ 예컨대 내가 사람, 말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의 존재를 말할 때 조재 자체는 형상적이며 받아진 것으로 고 찰되고 그것에 존재가 적합한 것으로 고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존재는 완전 즉 실제적 현실태이다. 그뿐 만 아니라 존재는 모든 현실의 현실성이며 모든 완전의 완전이다.

㉠ 이 절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전개되는 개념은 토마스의 설에 있어 하느님의 가장 높고 고유한 개념이다. 하느님은 본질에 의한 유이다. 이런 유에서 본질은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한편 피조물은 분유에 의한 유이 다. 이런 유에서는 존재는 실제로 본질과 구별된다.




5.

신은 어떤 류(類, 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류란 그 안에 포함되는 것들보다 먼저 개념되게 되는데, 신은 지성에 따라서도[즉 인식 질서에서 보더라도]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어떤 종(種, species)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이란 류와 종차(種差,differentia specialis)로 구성되는데(마치 현실태와 가능태처럼), 신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5節; 하느님은 어떤 類에 속하는가?㉡

하느님도 어떤 類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實體는 自立하는 有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하느님께 가장 適合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實體의 類에 속한다.

② 그 밖에도 어떤 것이든 모두 自己의 類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計量된다. 예컨대 길 이는 길이로, 數는 數로 헤아려진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實體들이 尺度이다. 이것은 註釋家의㉢ ‘形而上學’ 10券 註解에 의해서도 明白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實體의 類에 속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類는 類에 包含되는 것에 論理的으로 先行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實際的으로도 論理的으로도 하 느님께 先行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어떤 類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類에 속한다는 것은 一般的으로 두 가지로 말해진다. 그 하나는 端的으로 또 固有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類 안에 包含되는 種의 境遇이다. 다른 하나는 還元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것 은 點과 一性이다. 그 原理(根源)로서의 量의 類에 속하는 境遇이다. 盲目과 모든 缺如는 그것에 對 應하는 所有態의㉣ 類에 還元된다. 이 둘 中 그 어는 것에 의해서도 하느님은 類에 속하지 않는다.

事實 하느님이 어떤 類의 種일 수 없다는 것을 세 가지 模樣으로 提示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種은 類와 種差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種을 形成하는 種差가 그것으로부터 取해지는 바로 그것은 類가 그것으로부터 取해지는 바로 그것에 대해 現實態가 可能態에 대하는 것과 같은 狀態에 있다.
예컨대 動物은 具體化의 樣態를 통해 感覺的 本性에서 取해진다. 즉 感覺的 本性 을 갖는 것을 動物이라 한다. 그런데 理性的인 것은 知性的 本性에서 取해진다. 그것은 理性的인 것 은 知性的 本性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知性的인 것은 感覺的인 것에 대해 마치 現實態가 可能態 에 대한 것처럼 比較된다. 그리고 이 點은 다른 境遇에도 이와 비슷하게 明白하다.㉥ 따라서 하느님 에 있어서는 可能態가 現實態에 結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은 類에 속하는 種과 같은 것 일 수는 없다.

둘째로 하느님의 存在는 그의 本質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提示된 바이다. 만일 하느 님이 어떤 有에 속한다고 假定한다면 하느님의 類도 有일 것이다. 그 理由는 類는 어떤 것이 무엇 인지 敍述될 때 事物의 本質을 表現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形而上學’ 3券에서 “有는 어떤 것의 類일 수 없다.”라고 한다. 事實 모든 類는 類의 本質밖에 있는(本質을 分有하지 않 는) 種差를 갖는 데 反해 種差는 그 어떤 것도 有 밖에 있는 것으로서 發見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理由는 非有가 種差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類에 속하지 않는다는 歸結이 된다.

셋째로 한 類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敍述되는 類의 何性 혹은 本 質에 있어서 共通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存在에 관해서는 다르다. 예컨대 人間의 存在 와 말(馬)의 存在는 같은 것이 아니며 이 사람의 存在와 저 사람의 存在도 같은 것이 아니다. 이렇 게 類에 속해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 存在와 그것이 무엇인지 즉 本質이 달라야 한다. 하느님 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그런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 님은 類에 속하는 種과 같은 것이 아님이 明白하다.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하느님은 類를 갖지 않으며 種差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明白하며 또 그의 定議도 없으며 그의 論證은 結果의 의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明白하다. 그 理由는 定議는 類와 種差에서 이루어지며 論證의 媒辭는 正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느님은 類를 있게 하는 原理로서 還元에 의해 類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 떤 類에로 還元되는 根源은 그 類를 넘어서 自己를 延長해 가지 않는 데서 明白하다. 이것은 마치 點은 連續量에 대해서만 根源인 것과 같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存在의 根源이다. 이것은 後에 提 示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어떤 類에 根源과 같은 것으로 包含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實體의 名稱은 그 自體로서의 自立的 存在만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다. 그 理由는 存在는 앞에서 이미 提示한 바와 같이 類일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나 實體는 存在, 즉 그 自體로서의 存在가 適合한 本質을 意味하는 것이다. 이런 存在 는 그것의 本質 自體는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實體의 類에 속하지 않는 것은 明白하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저런 反論은 比例된 尺度에 대한 것이다. 事實 尺度 는 헤아려진 것과 同質的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것에 比例되는 尺度가 아니다. 그 런데도 하느님이 萬物의 尺度라고 불리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存在를 그만큼 더 많이 갖는다는 데서 그런 것이다.



㉡ 사물들의 최고류는 10개의 범주이다.
유는 10개의 범주로 존재에 참여한다. 그 첫째 범주는 실체인데 이 범주는 근원적이며 모든 변화의 基體가 된다.
이 실체 범주에는 다른 것 안에가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이 속한다. 이 실체의 범주에 대해 그 자체 안에가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즉 실체 안에 존재하 게 되는 것을 우유라 한다.
이런 우유는 그 기체로서의 다른 것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우유는 9개가 있다. 그것들은 양, 질, 관계, 능동 혹은 작용, 수동, 언제(시간), 어디(공간), 위치(위치적 상태, 배치), 소속(性狀), 습성이다.

㉢ 아베로에스는 1126-1198년에 살았던 스페인의 아랍철학자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의 유명한 주해 로 주석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 여기서 소유태(habitus)는 좁은 의미로 뿐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예컨대 결여(privatio)가 본래 갖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인데 대해 그런 것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류를 종적으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반술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포르피리우스는 종을 수적으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빈술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면 토마스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세 요인이 표현된다. 즉 사람, 이성적 그리고 동물이다.
이 경우 동물은 상대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양태이고 이성적은 규정하는 양태이고 사람은 전적으로 규정된 양태이다. 이런 개념은 뒤따라오는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류는 가능적인 것과 같은 것에서 취해지고 종차는 현실적인 것과 같은 것에서 취해진다.




6.

신에게는 우유(遇有, accidens )들이 없다.
우유들이란 주체를 보충하는 것인데 신은 '순수 현실(actus purus)'이므로 조금도 더 보충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6節; 하느님 안에 遇有가 있는가?㉦

하느님 안에도 어떤 遇有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自然學’ 1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實體는 어떤 것의 遇有가 아니다. 따라서 한 事物에 있어서 遇有인 것이 다른 事物들에 있어서 實體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예컨대 熱이 어떤 事物들에 있어서 愚有이기 때문에 熱은 불의 實體的 形象이 아니라는 것이 證明되는 바와 같다. 그런데 우리 안에 遇有로 있는 智慧와 能力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은 하느님께 歸屬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 에도 遇有들이 있다.

② 그 밖에도 어떠한 類에도 하나의 첫째 것이 있다. 그런데 遇有의 類는 많다.㉧ 따라서 만일 그 類들의 各各의 첫째 것들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다면 많은 첫째 것들이 하느님 밖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適切하지 못하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모든 遇有는 主體 안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主體일 수 없다.
보에티우스가 ‘三位一體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單純形相은 主體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遇有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 안에 遇有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明白히 드러난다.
그것은 첫째로 主體가 遇有와 比較되는 것은 可能態가 現實態와 比較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事實 主體는 遇有 를 따라 어디 程度 現實態 안에 있다. 그런데 可能態 안에서의 存在는 하느님한테서 全的으로 排除 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에서 明白하다.

둘째로 하느님이 自己 存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에티우스가 ‘데 헵도마디부스’에서 말하는 바 와 같이 “있는 그것(有)은 그것에 結付된 어떤 다른 것을 가질 수 있지만 存在 自體는 그것에 結付 된 다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더운 것은 더운 것 外의 다른 것, 예컨대 白色 같 은 것을 가질 수 있지만 熱 自體는 熱 外에 어떠한 것도 갖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로 自體로 있는 모든 것은 遇有的으로 있는 것에 先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端的 으로 第一有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 안에는 遇有的으로 있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하느님 안에는 예 컨대 人間에 있어서 웃는 것과 같은 그 自體로서의 遇有들도 있을 수 없다.㉨ 그 理由는 이와 같은 遇有들은 主體의 原理에서 緣由되는데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自身이 第一原因이기 때문에 하 느님 안에는 아무것도 原因되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는 어떠한 遇有도 없 다는 決論이 남게 된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後에 明白하게 되겠지만 能力과 智慧 가 하느님과 우리에 대하여 一義的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遇有들이 우리에게와 마찬 가지로 하느님께도 있다는 結論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實體는 遇有에 先行하는 것이기 때문에 遇有의 根源 은 先行하는 것으로서의 實體의 根源에로 還元된다. 그런데 하느님이 實體의 類에 있어서의 第一內 容은 아닐지라도 모든 類 밖에 있는 全存在의 第一의 것이다.



㉦ 우유는 어떤 것(사물)인데 바로 그것의 何性에 존재가 적합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가 적합한 것은 그것의 주체가 되는 다른 것 안에 적합한 것이다.

㉧ 우유는 9개가 있다. 질, 양, 관계, 능동 혹은 작용, 수동, 어디(공간), 언제(시간), 위치, 소속(습성).

㉨ 우유들은 그 자체로서는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 밖에 있는 것들인데 그것들은 형이상학적 본질과 결부된 다. 그것은 그것들이 본질의 원리 자체들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7.

신은 가장 단순하다.
A) 이미 말한 것처럼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질료 ·형상으로도, 본질 ·존재로도, 류 ·종차로도, 주체 ·우유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B) 더 더욱 복합될 수 없는 이유는.
(1)그렇게 되면 그 구성 요소들보다 후발적(後發的)이고 의존적일텐데, 신은 제일 유(Ens primum)이기 때문이고,
(2)또 그렇게 되면 신에게도 구성 요소드을 결합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할텐데, 신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며,
(3) 그리고 구성체에 있어서 부분들은 전체에 비겨 가능태에 있고, 전체는 부분보다 큰 법인데, 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적(神的)'이기 때문이다.

7節; 하느님은 全的으로 單純한가?

하느님은 全的으로 單純한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하느님께로부터 있게 되는 것들은 하느님을 模倣한다.
그러므로 第一有한테서 있게 되는 모든 것은 有이며 第一善한테서 있게 되는 모든 것은 善이다. 그런데 하느님께로부터 있게 되는 事物界에 있어서 全的으로 單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全的으로 單純하지 않다.

② 그 밖에도 하느님께는 모든 더 좋은 것이 歸屬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合成된 것들은 單純한 것보다 더 좋다. 예컨대 合成된 物體는 그 元素들보다 더 좋으며 元素들은 그 部分 들보다 더 좋은 境遇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全的으로 單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三位一體론’ 6券에서 하느님은 참으로 또 最高로 單純하다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全的으로 單純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明白하게 드러날 수 있다. 첫째로 앞에서 말한 바에 의해서다. 하느님은 物體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는 量的인 部分들의 合性이 없으며 形 相과 質料의 合性도 없다. 또 그 안에서는 本性과 自主體도 다른 것이 아니며 本性과 存在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類와 種差, 主體와 遇有의 合性도 없는 것이니 하느님은 어떤 模樣으로 도 合性되지 않았으며 全的으로 單純하다는 것이 明白하다.

둘째로 合性된 모든 것은 그 合性要素들보다 後의 것이며 그런 要因들에 從屬된다. 그런데 하느 님은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弟1有이기 때문에 全的으로 單純하다.
셋째로 合性된 모든 것은 原因을 갖는다. 그 自體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合쳐지는 것은 그 것들을 結合시켜 주는 어떤 原因에 의해서다. 그런데 하느님은 앞에서 이미 提示된 바와 같이 原因 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第一能動因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合性된 모든 것에는 하느님 안에 없는 可能態와 現實態의 合性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部分은 다른 部分의 現實態거나 혹은 적어도 部分은 全體와의 關係에 있어서 可能態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複合된 모든 것은 自己 部分들의 어떤 하나에 適合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같지 않은 部分들로 되어 있는 全體에 있어서 이것은 明白하다. 예컨대 사람의 어떤 部分도 사람이 아니며 발의 한 部分은 발이 아니다. 그런데 같은 部分들로 되어 있는 全體에 있어서는 全體에 대 해 말해지는 것이 部分에 대해서도 말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部分에 適合지 않은 境遇도 있다. 그 것은 空氣의 部分은 空氣이고 물의 部分은 물인 境遇와 같다. 예컨대 물의 全體가 2비쿠비타라 할 지라도 그 部分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合性的인 것에 있어서는 그 自體와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그런데 그 自體와는 다른 어 떤 것을 갖는다는 것은 形相을 갖는 것에 對해 말할 수 없다. 예컨대 흰 것에는 흰 槪念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지만 形相 自體에 있어서는 形相과 다른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 은 形相 自體 혹은 그보다도 存在 自體이니 하느님은 어떤 模樣으로도 合性된 存在일 수 없다. 그 러므로 힐라리우스는 ‘三位一體론’ 7券에서 이 點에 대해 다음과 같이 言及한다. “能力인 하느님은 虛弱함을 內包하지 않으며 또 빛인 그는 어둠을 包含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있게 된 것들은 原因된 것들이 第一原因을 模倣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模倣한다. 그런데 原因된 것의 槪念에는 어떤 模 樣으로 合性되었다는 것이 內包되어 있다. 그것은 後에 明白히 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것의 存在는 그것이 무엇(本質)인가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에게 合成된 것들이 單純한 것들보다 좋다. 그 것은 被造物의 善性의 完定性은 하나 안에 發見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에서 發見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神的 善性의 完定性은 後에 提示될 것이지만 單純한 一안에 發見된다.



㉩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 차별개념은 순수현실태로서의 하느님 안에 있는 순수존재의 전적인 단순성 과 피조물에 있어서의 가능태와 현실태 그리고 본질과 존재의 복합성과 이질성 등이다.




8.

그 어떤 것도. 마치 신이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거나 또는 사물의 형상 또는 질료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신으로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과 한 단일체로 구성된다면, 그때 이미 제일 유(Ens primunm)임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고,
가치가 전락되고 가변적(可變的)이 되어 구성체보다도 오히려 하위(下位)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8節; 하느님은 다른 것들과 合性을 이루는가?

하느님도 다른 것들과 合性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① 事實 디오니시우스는 ‘天上位階論’ 4章에서 “萬物의 存在는 存在 위에 있는 神性이다.”라고 한 다. 그런데 萬物의 存在는 各 事物의 合性 안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다른 것과의 合性을 이루는 것이다.

② 그 밖에도 하느님은 形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 말씀에 대하여’에서 “하느님의 말씀(그 것은 하느님이다)은 形成되지 않은 形相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形相은 合性된 것의 部分이다. 그러 므로 하느님은 어떤 合性된 것의 部分이다.

③ 그 밖에도 있으며 전혀 서로 다르지 않은 것들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과 第一質料는 온전히 같은 것이다. 그런데 第一質料는 事物과의 合性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하느님도 그와 같아야 한다. 中間 命題의 證明은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것들은 어떤 差異로 말미암아 다른 것이다. 그러 므로 그런 것들은 合性된 것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과 第一質料는 全的으로 單純한 것이다. 그러므로 兩者는 絶代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神名論’ 2章에서 “아무것도 그와의(하느님) 接觸이 없으며 또 部分的으로 그와의 어떤 混合의 交流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더욱이 ‘原因論’에서 “第一原因은 萬物과 混合되 지 않고 萬物을 支配한다.”라고 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 點에 대해서는 세 가지 誤謬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神國論’ 7券에서 나 타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이 世界의 魂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은 第一天의 魂이라고 한 것도 이런 說에 還元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은 萬物의 形相的 根源이라고 하였다. 이런 것은 알마리안파의 見解였다고 한다. 셋째 오류는 디난트의 디비드의 說이었다. 그는 아주 어리석게도 하느님이 第一質料라고 생각하였다. 事實 이런 說들은 明白한 虛僞를 內包한다. 하 느님이 어떤 模樣으로 어떤 것들과의 合性을 이루는 것은 그것이 形相的 根源으로서든 質料的 根源 으로서든 간에 不可能한 것이다.

첫째로 그 理由는 우리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第一能動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能動因은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事物의 形相들과 數的으로 같은 것이 아니라 다만 種的으로 같다. 사람은 사람을 낳기 때문이다. 質料는 能動因과 數的으로 같은 것이 아니며 種的으로 같은 것도 아 니다. 前者는 可能態에 있는데 後者는 現實態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第一能動因이니 첫째로 그리고 그 自體에 의해 作用하는 것이 그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과 合性을 이루는 것은 첫째로, 그리고 그 自體로 作用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合性된 것이다. 이와 같이 손이 作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作用하는 것이 며 불이 熱을 通하여 덥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合性된 어떤 것일 수 없다.
셋째로 合性된 것은 어떤 部分도 有들에 있어서 端的으로 첫째 것이 될 수 없으며 合性된 事物 들의 첫째 部分들인 質料와 形相도 例外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理由는 質料는 可能態에 있으며 可 能態는 現實態보다 端的으로 더 後次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明白하다. 그런데 合性된 것의 部分인 形相은 分有된 形相이다. 分有하고 있는 것은 本質에 의해 있는 것보다 後次的인 것과 마찬가지로 分有된 것 自體는 역시 本質에 의해 있는 것보다 後次的인 것이다.
이것은 불붙여진 것에 있어서의 불이 本質에 의해 있는 불보다 後次的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느 님이 端的으로 첫째 有란 것은 앞에서 提示되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神性이 萬物의 存在라고 하는 것은 能動因的으로, 原型的으로 말하는 것이고 本質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말씀은 原型的 形相이고 合性된 것의 한 部分으로서 의 形相이 아니다.

→ 셋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單純한 것들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어떤 差異 에 의해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合性된 것들에 속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과 말(馬)은 理性 的 그리고 非理性的 差異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差異 自體에 대해 말한다면 兩者는 서로 다 른 差異에 의해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嚴密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固有한 意味로 다르다고 할 수 없고 別個의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形而上學’ 10券에 의하면 別個의 것은 絶對的으로 말하는 데 反해 모든 다른 것은 어떤 點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 서 嚴密하게 말하자면 第一質料와 하느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別個의 것이다. 따라서 第一質 料와 하느님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結論이 따른다.


㉪ 헤겔(1770-1831)도 있는 것과 없는 것, 즉 있음과 없음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 모순원리를 거부 하기 위해 이와 엇비슷한 논리를 전개한다.

지금까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중 제1부 [신, 창조, 인간]의 신의 존재와 본성을 제1문에서 제3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보시다시피 방대한 원전에 비해 요약본은 그 줄거리만 추린 듯 하지만 이를 편찬한 세분 신부님들이 얼마나 힘든 일을 하셨는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을 이해하고 지식으로 폭넓게 활용하기에는 요약본이 훨씬 유익하리라는 생각을 저는 감히 해 봅니다.
2000년 6월 우연히 접한 [신학대전요약]본을 읽어보던 중 이를 홈피에 올려 많은 분들과 함께 하고파 더듬 더듬 타자를 치기 시작
하였고, 세해를 넘긴 2003년 9월 [보충부] 99문을 끝으로 기나 긴 작업을 끝내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무료게시판을 제공하
던 포탈이 문을 닫는 바람에 많은 데이타를 잃어버려 상당 부분 다시작업을 해야했습니다. 지난 주 우연히 웹서핑을 하던 중 동두천
성당 까페( cafe.daum.net/catholictdc)에서 정의채신부님의 [신학대전]원전 번역본을 발견하여 일부 옮겨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011년 6월 8일 안토니오